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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우 시인 / 피어라, 석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2.

김선우 시인 /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김선우(金宣佑)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른이 읽는 동화 『바리공주』.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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