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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바다 시인 / 장님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2.

김바다 시인 / 장님

 

 

  하나의 자물쇠를 열지 못하는 수많은 열쇠만을 만들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거다

  목이 잘린 채

 

  포기하라는 네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장마진 거리에서 내 귀는 결국

  십 수 년 된 노래를 당겨 삼키고 만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부글거릴 때 석유를 마시면 정말 좋아질까

  날개를 지상에 묶는 법을

  끝까지 연구 중이다

 

  한 번 펴면 접을 수 없는 날개는 결국 부러진다

  단 한 번도 자른 적 없는 머리카락 썩둑 썰어

  정수리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길 내고

 

  그렇게 살 줄 밖에 모르는 거다

  배를 뒤집고 쓰러지면 그녀처럼 죽는 거다

 

  발이 바닥보다 느리게 떨어지고

  늘 봄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어디쯤에서 몸 잘린 길 되짚어 보는 거다

 

  깨어지고 더럽혀진 채 뒹구는 사금파리 가장 눈부셔라

  반항적인 이목 구비구비

  홀로 불렀던 노래는 정녕 빠르다

  피가 다 빠져나간 넋에 실려 이리 저리

 

  맨발로 쓸 수 밖에 없는 거다

  비겁한 건지 용감한 건지 누구에게도 묻지 말자

 

  혀끝에 핀 코스모스

  강심에 빠진 별똥까지

  오직 귀로 존재하고 마지막에 가까워진다

 

  뿌리를 향해 타들어가는 꽃의 속력을 어떻게 계산하나

  맨 눈으로 고작 건져 올린 건 몇몇 불가사리들

  밖으로만 떠도는

 

  테두리가 허물어지면 안과 밖이 뒤바뀌고

  귀가 삼켜질 때 시작되는 완전한 어둠

  송곳니는 감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언제부터

 

  거대한 인력이 단호하게 두 눈알을 뽑는 중

  피가 없어도 피가 마르고

  눈이 없어도 눈이 보이는 순간의 이상과 이후

 

  모두 보게 될 것을 다만 먼저 보았을 뿐이다

  육(戮)시의 태양은 어둡고 차가워라

  제 발 아래는 열심히 환할지라도

 

계간 『애지』 2015년 봄호 발표

 

 


 

김바다 시인

1973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11년 《애지》로 등단. 시집으로 『싱글』(실천문학, 2017)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