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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선 시인 / 석고 캐스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2.

정영선 시인 / 석고 캐스트

 

 

  몸이 울었던 구멍이다

  살려고 격렬히 뒤틀던 몸을

  죽음이 고요히 바라보던 구멍이다

  뛰어가다 엎드린 장딴지의 힘줄

  저기까지 가려고 뻗던 손

  급습하던 유황냄새에 급히 코를 막던 포갠 손가락

 

  화쇄암이 덮친 자리

  술병은 새긴 그림을 붙들고 버티었다 이천 여 년을

  도자기 그릇은 무늬와 함께 잔해를 지키었다

  문을 똑똑 두드릴 누군가를

  재를 덮어 쓰고서 기다렸다

 

  주검을 감싸준 옷이 사라졌다

  얼굴에서 어깨뼈, 팔다리로

  몸은 천천히 지워져 갔다

  사라진 자 속 사라진 자를 살던

  구멍만이 구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갈망을 담던

  덜어도, 덜어내지지 않던 구멍들

  시간의 등을 타고

  나, 너 가슴에 구멍의 똬리를 틀었다

 

  너의 눈을 보면 가슴의 구멍이 보인다

  퍼내어도 남는 구멍의 슬픔

 

  몸 안 저토록 슬프고 아픈 자세를

  고고학자는 어떻게 찾아 냈을까

 

 

*고고학자 피오렐리는 화산재가 덮힌 구멍만 남은 자리에 석고를 부어 죽은 사람의 자세를 복원했음

 

격월간 『시사사』 2015년 1~2월호 발표

 

 


 

정영선 시인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문학동네 2000),『콩에서콩나물까지의 거리』(랜덤하우스, 2007)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서정시학,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