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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림 시인 / 수선화를 묻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2.

이경림 시인 / 수선화를 묻다

 

 

  그 때, 내가 한 수선화에 세 들었을 때

  수선화 노란 가루를 온몸에 쓰고 수선인 척 있을 때

  수선화 꽃색은 얼마나 노란가

  듣도 보도 못했을 때

 

  그 때, 내가 한 水仙에 세 들었을 때

  水仙의 낮은 하늘을 나는 제비나비 한 마리에 없는 속을 다 내줄 때

  문득 독침 같은 바람이 와 수선화 노란 물기를 다 걷어 가는 줄도 모를 때

  수선화, 수선 수선 물기 걷히고

  녹아내릴 듯 짓무른 목을 가까스로 가누고 있을 때

 

  그 때, 내가 수선화 노란 색에 세 들었을 때

  봄 아지랑이 파도치는 허기보다

  일곱 살 계집아이가 백발 노파가 되는 일 보다 더 노랗게

  세 들었을 때

 

  수선화, 노란 향기가 뼈마디를 다 녹이고

  수선화, 노란 색이 수선을 다 지우는 줄도 모를 때

 

  수선화 자태는 얼마나 애틋한지

  세살 적 처음 본 냇물처럼

  채 도착하지 않은 햇살처럼 애틋해서

  내가 그만 늙은 수선 한 잎으로 슬그머니 흘러내리고 싶을 때

 

  어느 캄캄한 회음부를 후룩 빠져나온 물이여

  꽃물이여

 

  거기가 어딘가

 

  아득하고 희고 푸르고도 노란, 그러나

  北溟보다 검고 희고 완강한 그 어른거림이 과연!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7년 봄호 발표

 

 


 

이경림 시인

194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89년 계간 《문학과 비평》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토씨찾기』(1992) ,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1995) ,  『시절 하나 온다,  잡아 먹자』(1997), 『상자들』(랜덤하우스중앙),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가 있음. 2001년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가 2001년을 빛낸 다섯 권의 책으로 선정. 2008년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출간. 2011년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출간.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영어권 번역 시집으로 『A NEW SEASON APPRACHING, DEVOURIT』 출간. 2011년 제 6회 지리상 문학상, 2016년 제 1회 윤동주 서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