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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은 시인 / 터미널케이스*에 갇힌 열일곱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4.

김도은 시인 / 터미널케이스*에 갇힌 열일곱

 

 

난 서랍을 열어요 마른 국화꽃잎이 붙은 상자가 놓여 있어요 연보라 국화꽃잎이 열두개인지 열세개인지 몇 번을 세어요 꽃잎이 마르기 시작해요

상자속 노란색 한지,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편지지, 노란색한지는 줄이 없어요 긴 숨이 이어져요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색 편지지엔 줄이 있어요 줄과 줄 간격이 너무 좁아요 곰돌이들은 줄에 꿰어져 대롱거리고 있어요 줄과 줄사이는 점점 좁혀지는것 같아요 줄과 줄사이에 내가 있어요 윗줄은 내려오고 아랫줄은 올라가요

 

가방속에 있어요 가방안감에 그려진 곰돌이들이 내 몸 위로 기어 다녀요 가끔은 내 겨드랑이에 숨어 간지럽혀요 내가 웃으면 엄마를 알아본다고 해요 엄마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곰돌이는 원래 아주 작은 벌레였어요 곰돌이는 자꾸 커지는 것 같아요 가방의 지퍼가 열리면 곰돌이는 재크의 콩나무를 타고 숲으로 돌아갈거예요

엄마가 가방을 메고 건물들 사이로 뛰고 있어요 내 다리가 마구 흔들려요 엄마가 뛰고 나도 뛰었나봐요 가랑이 사이가 저려와요 난 입안에 주먹을 넣어요

 

난 흔들 바구니에 누워 있어요 엄마가 흔드는 우유병에서‘피익’소리가 나요 180ml를 먹어야 해요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아마도 엄마는 중얼거릴 거예요 두 숨씩 한 번에 쉬어야 할 때도 있어요 땀과 우유와 침이 섞여 목에 걸리면 얼굴이 터질 것 같아요 엄마가 소리 질러요 내 빨간 얼굴을 보며 엄마 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해요 엄마 눈동자가 내 얼굴에 떨어져요 난 그때마다 재크의 콩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요 오를때마다 내 다리가 흔들려요 난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입을 막았어요

 

난 책상 앞에 있어요 눕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예요 오른팔이나 왼팔을 귀에 붙이고 머리를 두어야 해요 각도가 틀어지면 침이 흘러 도형이 일그러지고 알파벳끼리 엉켜 버리는 수가 있어요 반대편으로 누워도 입은 자꾸 벌어져요 꿈에서 난 뛰고 있지만 제자리예요 난 또 오줌을 싸버렸어요 난 꿈을 잭크에게 맡기고 뛰기 시작해요 서둘러 콩나무를 잘라야 해요 손이 움직여 지지 않아요 어디로 뛸지 몰라요 잘려진 콩나무가 하늘로 이어졌어요 난 콩나무를 타고 올라 갔어요 엄마가 소리를 질렀거든요

 

난 윈도우XP 앞에 있어요 스페이스를 누를때마다 재크, 오른쪽으로 뛰어요 엄마는 노크하지 않아요 내 XP 에서 뛰고 있는 잭크를 버튼 속에 밀어요 엄마는 내 머리를 만지며 주문을 외어요 주문이 길어지면 잭크가 뛰쳐나오려 해요 난 스페이스를 눌러요 엄마의 주문과 주문사이 멀어져요 버튼뒤에 밀려 들어간 잭크, 뛰쳐 나오고 내 입은 퓽--퓽---퓽 총을 쏘아요 난 재크와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콩나무를 타고 내려와요 누군가 내 뒤를 쫓고 있어요 난 버튼을 눌러요

 

 난 엘리베이터 앞에 있어요 콩나무를 타고 도착한 곳이예요 숫자를 찾았어요 1 위에 20 이 있어요 그다음 21예요 1과 20사이의 숫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잭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잘라낸 콩나무는 또 어디로 갔을까요 난 엘리베이터에 안에 있어요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등이 무거워요 돌아볼 수 없어요 목 돌리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엄마를 불렀어요 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어떻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 잊어버렸어요 재크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엄마도 오지 않아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다리가 저려와요 언제쯤 문이 열릴까요

 

난 줄과 줄 사이에 있어요 줄을 끊을지, 줄을 밀어낼지, 머리를 흔들었어요 한줄이 두줄이 되었다 두줄이 한줄이 되네요 소릴 질러보려고 해요 줄과 줄사이에 등을 구부린 곰돌이 한 마리가 있네요 재크도 어디선가 왔어요 콩나무를 타고 줄사이를 걸어오고 있어요 땀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오줌이 흐르고 있어요 난 신음소리를 냈어요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닫혔다 해요 난 없어져버린 2부터 찾기 시작했어요 3을 불렀어요 그다음엔 4..5...........7,8,9 줄과 줄사이에 10, 11...15....20

 

*터미널 케이스(Terminal Case) :자살 시도 직전, 극도의 감정적 혼란과 충동적 행동을 보이는 단계

 

 


 

김도은 시인

2015년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