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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민 시인 / 피아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6.

안민 시인 / 피아노

 

 

  피아노가 죽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피아노다

  몸 안에 현이 심어져 있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기억 속을 방문하는 창백한 소녀

  손가락 사이에서 푸른 새들이 난다

  손톱에는 붉은 꽃잎이 비치고

  에테르, 너울거리며 밀려오는 에테르

  나는 피아노 선율처럼 흘러온 것이다

  악보 같은 차트를 흔들며 들어서는 흰 가운들

  저들은 왜 검은 빛을 흘리는 걸까 피아노인가

  病人이 아니라 피아노로 살아온 것에 대해

  동공이 먼저 증거할 때 나는 열일곱 살이 된다

 

  어둠을 진동시켜 소리가 들리게 되는 거죠

  잠이 내려가는 깊이는 약 10mm이고 잠의 무게는 50g 전후입니다

  저음은 아주 무겁게 고음은 조금만 가볍게 조정되어있어요

  뼈는 장식성을 고려하여 아크릴이나 인공 상아, 베이크라이트 등의

  합성수지일 것입니다

  뼈를 잠 속에 빠트려 그 공률로 현을 치게 됩니다

  악몽은 이때 완성되죠

  조율되지 못할 만큼 자랐습니다

 

  흰 가운들이 피아노를 판독하기 위해

  내 몸을 밀폐된 통속에 밀어 넣는다

  뚜뚜뚜뚜 징징징징 디디디디 쿵쿵쿵쿵

  두개골 안에서 낙엽이 흩날린다

  졸면 안 돼 졸면 안 돼…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내 심장을 만진다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내 동공을 만진다

  나도 소녀를 만진다

  내 그림자를 소녀 그림자에 포개 놓는다

  하얀 건반 하얀 가슴 까만 건반 까만 거기

  하얀 어둠 까만 어둠 망막이 젖는 소녀

  빗물 같은 음악이 된다 도시라솔파미레도

  피아노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아득한 저음으로 내려간다

  뚜뚜뚜뚜 징징징징 디디디디 쿵쿵쿵쿵

  내 몸속 피아노는 귀를 틀어막고 있고

  악보는 홀로 펄럭이고

 

 


 

안민 시인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여 부산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3년 제2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당선. 시집으로 『게헨나』(현대시, 2018)와 『아난타』(모든시, 2019)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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