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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호기 시인 / 흐른다 3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8.

채호기 시인 / 흐른다 3

ㅡ산

 

 

1

 

안개가 산으로 흐르면 골짜기, 산봉우리, 낭떠러지와 굴곡과 균열들이 젖빛 속치마 속에 감추어져 어른어른 비친다. 베일에 가려져 은밀하게 부풀어 오르고 번지고 사그라지는 산의 속살들, 안개가 산으로 흐르면

 

길이 산으로 흐르면 점점 깊어져 그 끝을 알 수 없고 철로가 산으로 흐르면 총탄에 맞은 것처럼 큰 구멍이 뚫리면서 꼬치 같은 기차에 꿰어져 산은 송두리째 태양의 화덕에 익으며 검은 석탄 같은 피를 쏟아낸다. 그러나 꽃들은 빨갛게 노랗게 부풀어 오른 작은 화상에 불과할 뿐 산은 더 이상 익혀지지 않는다.

 

바람은 공간의 흐름이지만 산은 시간의 흐름. 산은 제 몸을 잘게 부수고 해체하며 바다로 달려간다. 산의 열정과 바다의 정열이 맞부딪치는 그곳, 숨 막히는 파도 들끓는 절벽 흰 모래알의 침묵들

 

2

 

산으로 흐르면 바위, 나무, 뒤엉킨 풀, 흙 알갱이들로 몸이 녹아 흘러내린다. 내 몸은 산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바위 자갈 나무 풀! 동료들은 바위틈 나무의 주름 계곡물 속으로 애타게 나를 찾아다닌다. 헛된 삶의 흔적들을

 

산의 나무의 오랜, 상상할 수 없이 오랜 삶 속에 내가 잠겨 흐른다. 나의 눈동자로, 내 몸이 압축되어 전체가 눈동자인 눈동자로 흐르는 그것을 응시한다. 그것은 그토록 내가 체험하고자 했던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무엇-저 산들 울퉁불퉁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와 근육이 팽팽하다. 팽팽하고 욱신거리는 그 무엇.

 

 


 

 

채호기 시인 / 환한 대낮에

 

 

  저 푸른 바다가 너를 낳았네

  대낮, 황금의 모래들이 허공을 뒤덮고 있는

  고요한 대낮, 부서지는 거품이 네가 되어

  걸어왔네, 2층의 층계참으로부터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네가 하얀 벽으로부터 튀어나오듯이

  어디선가 깊은 지하에서 울려나오듯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굴러다니는 대낮

  층계를 내딛는 하얀 발과 네 존재의 무게를 지탱하려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는 발가락들

  뒤로 한 가닥 묶은 머리 한 올이

  갓 태어난 장미 가시처럼 이마에 흐르고

  너의 넘치는 심장을 덮고 있는 둥근 젖가슴은

  격정을 이기지 못해 두 송이 검붉은 열매를 익혔구나

  현기증 나게 밝은 대낮, 세상은 너무 밝아

  모든 사물들이 하얗게 탈색해가고

  공기는 점점 희박해져 투명해지는구나

  너의 창백하도록 흰 살결은 어디 가고

  저렇게 하얀 벽만, 굴곡도 없이 평평한 벽만이

  예전처럼 아무런 대답 없이 있다네

  다만 너의 허벅지 사이 검은 거웃만이

  네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검은 얼룩으로 남아 떠돌며,

  두 눈으로 빨려들며 눈동자를 더욱 어둡게 하는구나

  닻을 잃어버린 집은 둥둥 떠다니며 요동치고

  내 발은 세찬 물결에 휩쓸리는 배처럼 출렁거리며

  창가에서 무서운 해일이 일고 있는 정원을 바라보네

  환한 대낮, 갑자기 엄습한 네 사랑 때문에

  나는 내 삶의 항구를 잃어버렸네

 

 


 

채호기 시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대전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픈 게이』(1994), 『밤의 공중전화』(1997), 『지독한 사랑』(1999), 『수련』(2002), 『손가락이 뜨겁다』(2009) 등이 있음. 제 21회 김수영문학상과 제8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문학과지성사 편집장 및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역임.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