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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명 시인 / 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쉬었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9.

이진명 시인 / 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쉬었네

 

 

  지하철 문 열리고 닫히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몸집 작은 청년 곧바로 와 선다

  뜻밖의 자주색 긴팔셔츠로 눈앞을 커튼 친다

  자주색 좋아해 자주에 나도 모르게 감응해들다가

  셔츠 너무나 단정하고 너무 발라서 훅 놀란다

  잠긴 일곱 단추의 일렬도 놀랍도록 자로 잰 일렬

  일곱 단추 깨끗한 눈마다 상아빛 광택

  이전의 이전부터였다는 듯 거둘 수 없다는 듯 빛이

  그런데 단추 이토록이나 꼭바르게 잠글 수 있나

  잠금이란 게 이토록이나 완전하게 무결일 수가

  아름다울 수가 훌륭할 수가

 

  저절로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했다

  스물은 넘었을까 이제 막 스물일까

  작은 키에 마른 몸피

  타이는 하지 않았고

  어린 청년 어떤 감각에 자주색 셔츠를 다 골랐을까

  셔츠의 다림질은 또 이토록 다림질일 수 있을까

  천 질감도 참기 어렵게 좋아 보여 만져보려 손 뻗어야 했다

  철커덕 컥, 바퀴 마찰소리에 뻗었던 손 그만 잘려

  철교 아래 강물 속으로 나뭇잎처럼 빙빙 돌며 떨어진다

  모른 척 다시 눈앞 커튼 친 자주 셔츠를 뚫는다

  이렇게 극단정의 구김 한끝 없는 셔츠 스물 삶의 안쪽에도

  녹슨 체인은 철컥인다는 옹알이가 맥락도 없이

  맥락도 없이 강물로부터 올라와 무릎 위를 긴다

 

  뭘 하러 가려는가 마른 안구를 비비며 어디로 뭘

  강물에 빠지면 헤엄도 못 치는데

  천둥, 번개 같은 것

  돈과 일, 내일의 안녕이라는 것에는 초점 한번 못 맞추고

  지하철 칸에 앉아 왜소한 청년의 자주색의 자주

  잠긴 셔츠 단추에나 겨우 초점을 맞춰 뚫어보면서

  셔츠의 단추라는 게 북두칠성하고 상관있나 일곱을 달게

  상상력도 없는 창작을 하다가

  선릉을 놓칠까 선릉이란 이름을 불안히 쥐고

  강변에서 짧은 갈대숲 바람에 이울었다가

  잠실나루로 더 맹목 신천을 바라며 멍히 가네

 

  그러나 극단의 자주셔츠 단추의 스물 청년이여

  그대의 단추와 초점을 맞추며 나는 쉬었네

  그대의 단추와 초점이 맞을 때 나는 뚫려

  어디로 뭘 하러 흘러가지 않고 영원의 구멍에 들었네

  그대 셔츠 단추의 일곱 별로 옮겨 맺혀

  앞에 앉아 있는 빈 형상에게

  상아빛 은은한 광택을 되비추었네

  이전의 이전부터였다는 듯 그렇게

  그때 나는 쉬었네 무결하였네

 

 


 

이진명(李珍明)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0년 계간 《작가세계》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출판사 민음사에 근무하였으며 계간 《세계의 문학》편집 업무를 맡기도 했다. 시집에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이 있다. <일연문학상>, <서정시 문학작품상> 등 수상했고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한국문학예술위원회창작기금> 등의 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