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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정원 시인 / 그대라는 문법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9.

한정원 시인 / 그대라는 문법

 

 

  바퀴 없이 굴러가는 풍경들,

  편집 되지 않고 돌아가는 느와르 필름들,

  에스컬레이터의 멈춤 표시를 누르자

  조각난 풍경들이 관성의 힘으로 쏟아진다

 

  너는 오늘 두 번이나 이곳을 지나쳤지만

  처음처럼 첫눈처럼 첫가을처럼 내리지 못했다

  과거완료와 미래형뿐인 네가 현재가 되는 장소

  찔레꽃 그물망 붉은 담장 아래

  오후 한 시와 네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이십 년 걸려 나를 이해한 시간들은

  동쪽에서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칠월의 태양처럼 확실하게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

  나의 긍정이 불투명한 부정이 되고 만다는 것

 

  나의 언어에서 ‘그러나’를 빼면

  무엇이 생길까

  너를 부르기 위해 평화를 스물한 번

  미래를 열한 번 중얼거린다

 

  전지를 끝낸 쥐똥나무가 무빙 워크로

  강변 쪽 토끼 굴로 이동한다

  지평선을 긋고가는 에스컬레이터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지워버려야지

 

  푸른 동맥을 짚으며 햇살을 따라가는 의문들

  뼈를 보일 수 있을 때만 나타나는

  나의 감옥 속 바퀴

  오후 두 시와 다섯 시,

  마술사의 시간처럼 향기를 달고 굴러간다

 

  너는 오늘 두 번이나 이곳을 지나쳤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그래

  처음엔 이름을 잊는다

  다음엔 얼굴을 잊는다

  그리고 너라는 습관을 잊는다

 

 


 

한정원(韓正媛) 시인

1955年 서울 출생. 세종대학교(전 수도여자사범대) 교육학과 및 동 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1998年 《현대시학》으로 문단 데뷔. 서울 한영중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시집으로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