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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끝별 시인 / 크나큰 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9.

정끝별 시인 / 크나큰 잠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 소식처럼

  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 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 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 밤이 있으니

  한 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 198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이 당선. 1994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으로 당선되어, 시작 활동과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이 있고,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시해설집 『시가 말을 걸어요』 『행복』 『밥』 『한국애송시 100편──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가 있고, 산문집 『여운』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가 있다.  <유심작품상>과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