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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관순 시인 / 첫 문장은 오렌지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

지관순 시인 / 첫 문장은 오렌지

 

 

  오렌지와 오렌지가 아닌 것을 아무리 바꿔치기해 보아도

  오렌지는

  오렌지

 

  자신이 오렌지임을 막 깨닫는 찰나의 오렌지가

  몸을

  가늘게 떨고 있다

 

  세상에나 이렇게 우쭐대는 오렌지가 있다니!

 

  아주 오랜 생각 끝에서 오렌지는 끝끝내

  오렌지

  놀랄 때마다 순식간에 익어버려서 아무도 오렌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버리게 놔둔다

 

  오렌지에서 오렌지까지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오렌지 이후 나뭇가지의 관심은 오로지 오렌지

  오렌지를 떠나본 일 없는

  오렌지가 결코 돌아올 일 없게 자신을 멀리

  던진다

 

  머리 깨질까 말까 온몸 흩어지더라도 오렌지의

  미래는

  온통 오렌지

 

  첫 번째 문장은 아직도 오렌지 꼭지에 매달려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0월호 발표

 

 


 

지관순 시인

제10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5년 《시산맥》으로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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