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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노해 시인 / 이불을 꿰매면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박노해 시인 /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치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 장벽

 

 

내가 길들여진 노동자였을 때

저임금의 응달 속을 장시간 노동에 지쳐

캄캄한 장벽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높고 두터운 장벽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내가 외쳤을 때

내 입은 봉해졌고

메아리쳐 온 허망한 상처뿐이었다

 

내가 뛰어가 부딪쳤을 때

장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차갑게 피를 닦아 주었다

 

내가 속삭이며,

긴 세월을 절뚝이며 속삭여

동료들과 함께 얽혀들어

맨몸으로 수없이 벽을 쳤을 때

피에 젖은 장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마로 구멍을 뚫고

긴긴 밤을 숨죽이며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을 때

콰르르르 거대한 장벽은 무너지고

너와 나 사이 가슴 속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환히 열린 언덕으로 뛰어갔을 때

캄캄한 장벽 밑마다

쿵쿵 까부수는 소리

에워싸며 구멍 뚫는 소리

참혹한 비명소리

우리들은 또다시 전열을 추스리며

수없이 불어난 동지들과

탄탄한 연대 위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우리들의 평등한 푸르른 대지를 향해

너는 함마

나는 다이나마이트

살덩이로 불꽃으로 불도쟈로

갈수록 무겁고 힘찬, 치밀하고 확실한

노동자의 전진을 내어딛는다

 

우리들의 숙명인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이 사라질 때까지

억압과 착취와 분단의 장벽이

사라질 때까지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16세 때 상경하여 낮에는 노동자로 생활하고 밤에는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년 스물일곱 나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1989년, 분단 이후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