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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인 시인 / 국지성 폭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9.

정다인 시인 / 국지성 폭설

ㅡ노숙

 

 

휘갈겨 쓴 이 눈발은 누구의 서체입니까 웃자란 불빛과 건물들이 엉켜 치렁거립니다 나는 이미 멀리 와 버렸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새의 동공이 사그락 사그락 내려 쌓입니다 내 뒤로 늙은 나무의 가지가 툭툭 부러집니다 지지직거리는 실금들이 귓속으로 휘몰아칩니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나는 누구의 이명입니까

 

폭설 속으로 걸어가 스스로를 밀렵하는 겨울 산짐승의 허기가 나를 끌고 갑니다 비척거리며 주저앉는 절망이 나의 문맹입니다 아무 것도 나를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입니다

 

쏟아지는 것들의 영혼에 몸을 묻습니다 더운 미음처럼 끓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껍질은 쓸쓸해서 구겨버린 폐지입니다 그 위에 하얗게 열린 새의 눈이 쌓이고 또 녹습니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공중입니다 서서히 물이 차는 잠입니다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나는 또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7월호 발표

 

 


 

정다인 시인

2015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자 k』(한국문연, 2017)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