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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철 시인 / 읽는다는 것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1.

이기철 시인 / 읽는다는 것

 

 

  파종마다 고요를 깨뜨리는 범종소리가 들어있다

  동토를 건너온 종자들이 다시 풍경소리를 낼 때

  풀도 나무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깨우친다

 

  일생 서서 흔들리는 나무가 무연으로 서 있겠는가

  그의 무릎 아래 근골 아래 글썽이는 마음 고여놓고

  슬픈 전설로 남아있는 여름하늘의 별자리를 우르런다

  별에도 소 끄는 남정과 베 짜는 여인네가 있다는 상상은

  인간이 하늘로 오르고 싶다는 희원

  그 희원이 멀면 멀수록 그것은 얼마나 슬픈 아름다움인가

 

  돌아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를 예까지 데리고 온 것은 성좌전설보다 억세고 질긴 힘이다

  견인이라는 말은 목이 마르다는 말

  목마르게 그의 구문을 따라가야 최소한의 나무의 심금을 읽을 수 있다

  생각하면 구름이 남루해진 것도 그가 너무 멀리 걸어온 까닭이다

  얼마나 몸이 무거웠으면 구름은 비가 되어 내리겠는가

  비라고 부를 때 우리는 벌써 맹목의 외투

  반신이 젖거나 비애의 여울물에 들어서지 않느냐

 

  독창에 찔린 가슴으로 누굴 사랑해 보지 않고는

  뇌우에 부러진 나무를 말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 천년을 견딘 나무가 그를 관통해 간 유구를 읽게 한다

  아니다, 천년을 견딘 나무가 나에게 시심을 깨워 그를 쓰게 한다

 

  그 구절을 읽는 데도 백 가지 마음이 있었을 터이니

  나는 내 비애의 날줄 지나간 북의 횡행으로 읽는다

  자고 나도 나무가 그곳에 있다는 거룩한 안도

  그것은 성좌의 불멸과도 같은 것

 

  몇 장을 읽으면 봄비 소리, 몇 장을 더 읽으면 천둥과 먹구름

  거기에 어찌 깊은 주름으로 옹이진 삭풍은 없겠는가

  저 횡액들을 모아 푸른 비로드를 만든

  나무의 海岸을 읽게 하는 연원 모를 힘

 

웹진 『시인광장』 2011년 9월호 발표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영남대 문리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을 졸업.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선집 『청산행』과 시집으로 『열하를 향하여』외  다수 있으며  그밖의 저서로는 『손수건에  싼 편지』, 『시학』 『작가연구의 실천』등이 있음.  1993년 시집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로 '김수영문학상'수상, 1998년  시집 『유리의 나날』로 '시와 문학상'  등을 수상. 1976년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대구시인협회 회장 역임. 1995년 뉴욕주립대 방문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