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 ㅡ 뿌리
화분 속에서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려내지 못한 채로
끊어진 붓질의 한 자락 같은 줄기로, 줄기 같지 않게 가늘게 말라가는
허브의 맨 끝자락을 들여다보면서 허브라는 향기를 한 자락 기억하고 싶었다
참 무수한 기억이 얽혀있는 뿌리와 뿌리가 동거하는 동안의 몸부림처럼
화분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야기가 꺼내져 나왔다
숨을 죽이면서 사랑을 배우고 싶은 이의 마음이 얽혀 있는 거 같다
화분을 뒤집었을 때 그이의 심장을 닮은 조약돌이 와르르
새끼를 쳐서 한 주먹 쏟아져 나오는 줄 알았다 (너는 그랬다)
환한 햇빛 한 자락 모서리를 보면서도 이제까지 아프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너는 그랬다)
나비를 기다리는 너를 사귀고 싶어서 분(盆)을 옮겨 심는 두 손바닥,
열 손가락 끝 손톱에는 검은 밤을 닮은 흙이 새어들어 기다린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는 마른 허브 줄기 한 쪽, 잎사귀 떨어진 귀가 시렵다
허브 향이 손가락을 벌려 휘어진 그늘을 오랫동안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참 멀리 그이의 향기가 묻어있는 어깨를 쫓아다니는 것 같다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기성 시인 / 실종 (0) | 2020.01.11 |
|---|---|
| 허형만 시인 / 풀독(毒) 외 1편 (0) | 2020.01.11 |
| 황지우 시인 / 동일방직을 지나며 외 2편 (0) | 2020.01.11 |
| 이기철 시인 / 읽는다는 것 (0) | 2020.01.11 |
| 강인한 시인 / 저녁 비가(悲歌) 외 1편 (0) | 2020.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