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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1.

이기인 시인 / 아프지 않아요

ㅡ 뿌리

 

 

  화분 속에서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려내지 못한 채로

 

  끊어진 붓질의 한 자락 같은 줄기로, 줄기 같지 않게 가늘게 말라가는

 

  허브의 맨 끝자락을 들여다보면서 허브라는 향기를 한 자락 기억하고 싶었다

 

  참 무수한 기억이 얽혀있는 뿌리와 뿌리가 동거하는 동안의 몸부림처럼

 

  화분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야기가 꺼내져 나왔다  

 

  숨을 죽이면서 사랑을 배우고 싶은 이의 마음이 얽혀 있는 거 같다

 

  화분을 뒤집었을 때 그이의 심장을 닮은 조약돌이 와르르

 

  새끼를 쳐서 한 주먹 쏟아져 나오는 줄 알았다 (너는 그랬다)

 

  환한 햇빛 한 자락 모서리를 보면서도 이제까지 아프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너는 그랬다)

 

  나비를 기다리는 너를 사귀고 싶어서 분(盆)을 옮겨 심는 두 손바닥,

 

  열 손가락 끝 손톱에는 검은 밤을 닮은 흙이 새어들어 기다린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는 마른 허브 줄기 한 쪽, 잎사귀 떨어진 귀가 시렵다  

 

  허브 향이 손가락을 벌려 휘어진 그늘을 오랫동안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참 멀리 그이의 향기가 묻어있는 어깨를 쫓아다니는 것 같다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발표

 

 


 

이기인 시인

1967년 인천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작과비평사, 2005)과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