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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인한 시인 / 풀칠하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2.

강인한 시인 / 풀칠하기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일과시간표를 새로 작성해서

분필통에 붙히던 날

마흔 두 살의 동료 교사가 죽었다.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보다 건장하던 그였다.

 

요쿠르트 아줌마가 박 선생의 소식을 듣고

고개 숙여 울었다.

윤 여사, 왜 어제 거기로 안 나왔지?

박 선생의 실없는 농담이

그의 책꽂이에 아직도

해법 수학으로 꽂혀 있는데,

 

풀 속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친화력이 들었나 보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시간표와 분필통은

서로를 죽자 사자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례식날 아침

그의 어린 유가족을 보았다.

우리 집 아이들 또래

그 애들은 울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 울었다.

 

이십년 가까이 개도 안 먹는 똥을 누며

삶의 함수를 하루내 풀던 사람

내가 단락을 나누고 문장을 자를 때

옆 교실에서

인생보다 어려운 문제에 매달리던 사람,

 

그에게는

아말감으로 때운 어금니가 두 대

충치로 괴로와하는 나를 보며

그는 자신의 입을 벌려

치료된 어금니를 보여주었다.

휴식 시간의 햇살이

박 선생의 어금니를 기웃거리던

그게 지난 가을이던가.

 

풀칠을 단단히 해서

책상의 한 귀퉁이에도 나는

시간표를 붙여 놓았다.

아마도 이게 호구의 상책이지 싶어서.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 해 지는 곳으로 가서

 

 

해 지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

아들아

우물에서 냉수 한 바가지

벌컥벌컥 마시고

잎 진 감나무 한 그루를

활활 태우고 넘어가는

저녁 놀 속에

나도 잎 진 감나무 한 그루로

서고 싶다

해 지는 곳에서

꿈 같은 그리움을 부비며

하룻밤인 듯 남은 목숨을 태워

거기서 살고 싶다.

 

우리 나라 날씨, 나남, 1986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이상기후』(1966), 『불꽃』(1974), 『전라도 시인』(1982), 『우리나라 날씨』(1986), 『칼레의 시민들』(1992), 『황홀한 물살』(1999), 『푸른 심연』(2005), 『입술』(2009) 등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 그리고 시비평집『시를 찾는 그대에게』(200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