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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1.

이규리 시인 /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처럼

  순간이 순간을 불러 순간에 복무하는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웹진 『시인광장』 2013년 9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