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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 / 가건물 속의 희멀건 희망
나이 들수록 누추해지는 가건물인 몸 안에, 꾸물대며 죽어 가는 희망이 산다.
실망과 피로의 납덩이들이 쌓이는 날, 몸 구석에 꼬부라져 잠자던 희망, 불멸이라는 말에 번쩍 고개를 쳐들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허물어질 가건물의 일부이며, 흩어질 조각더미임을 긍정한, 희망이 산다, 살아간다.
마치 옛집으로 가던 노파가 목구멍에서 끄집어내 황토 길바닥에 팽개치던 회충처럼, 꾸물거리며 죽어 가는, 희멀건 희망이.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공터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 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 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灼晩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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