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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자화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2.

유안진 시인 / 자화상

 

 

한 오십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헝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뒷뜰 언 밭을 말 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 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 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렵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도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구름의 땅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시와시학사, 1995

 

 


 

 

유안진 시인 / 잘못

 

 

잘못하면 알아진다

 

    너무 많은 진실과 너무 많은 거짓이

    인생 한마디로 졸아들고 마는 것을

    마흔 나이로 일흔의 생애도

    결국엔 인생이란 두 글자에 담겨지고 마는

    것을

 

그래서 인생은

봄날 꽃일 수 없고 여름 녹음일 수도 없는 것을

오히려 인생은

밤에 우는 고목의 썩은 등걸인 것을

 

잘못해봐야 알아진다

 

    마흔다섯은 마흔 살과 진배없고

    마흔 아홉이 쉰 살보다 더 늙는 것을

    마음의 헤매임이 몸의 헤매임보다

    더 거칠고 황량하다는 것도

    제 주먹보다 작은 술잔 속에 빠져죽고 싶고

    운명에 복수하듯 되살아나고 싶은 것이

    인생이란 것을

 

잘못해봐야 알아진다

 

    거짓말일지라도

    진리처럼 믿게 해줄 무모한 용기가 그립고

    그런 거짓말쟁이 한 사람이 그리운 게

    인생이란 것도

 

잘못하면 알아진다.

 

월령가 쑥대머리, 문학사상사, 1990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1975) 『월령가 쑥대머리』(1990), 『봄비 한 주머니』(2000)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8) 『축복을 웃도는 것』(1994)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4) 등의 작품이 있음.

그밖에 『한국의 전통 육아방식』(1987) 등 다수의 전공저서와 논문을 상재.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현재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