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겨울단장(斷章)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3.

천양희 시인 / 겨울단장(斷章) 1

 

 

이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도 없을 때

마음은 낡은 기차 바퀴처럼

털털거린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차창에는

두꺼운 상처같은 성에가 끼고

갑자기

내 입김속에 들어오는

창밖은 빈 들이다 빈 들이다

지나치는 일보다 더 빨리

빈 들은 지나간다

지난날의 구름조각들도

지나가 버린다

 

남은 것은

거친 들 바람속에 세워둔 몸뿐

몸 위에는

눈물같은 서리가 덮여 있다

 

길이 끝나기 전에는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겨울

눈보라 속에 놓이는

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평민사, 1983

 

 


 

 

천양희 시인 / 그리운 인력(引力)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들이 그립다

모양도 무게도 없는 것들이 그립다

세상 나무들 일제히 손들고

이땅 위 새들도 새끼의 작은 발톱을 아끼고

날아야지 날아야지 마음 먹을까

우리들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

잡초 같은 삶 속까지 솎아내고 싶어

하루종일 땅만보고 땅만보고 땅만보고 있을 동안

세상은 몹쓸 암을 키우고

우리의 하나 남은 하늘까지 덮쳤지

기댈 곳 없어 쓰러진 나무

말라 비틀어진 신음소리 들리나요? 들리나요?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들

다 새가 아님을 알고난 뒤

기억하시는지

깊이 가라앉아 세월 보는 일

물 흐르고 흐른 뒤

흔적 남기지 않는 일.

 

사람 그리운 도시에, 나남, 1988

 

 


 

 

천양희(千良姬) 시인

 

아버지 천명수와 어머니 임덕순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당시 부모님이 큰 과수원을 운영하여 집안 살림이 넉넉했다. 재가불자(在家佛子)였던 할아버지와 한시와 창(昌)에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쓴 동시를 읽고 시인이 될 거라고 칭찬해 주던 담임 선생님의 영향으로 시인을 꿈꾸게 되었다

 

1953년 사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남여자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그녀는 3년간 기차 통학을 하면서 창밖 풍경에 매료되어 한때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북경의 55일〉 등과 시집 등을 읽으면서 시인으로 자연스럽게 진로를 바꾸었다. 1962년 경남여고를 졸업했으나 알 수 없는 병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65년 〈현대문학〉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정원(庭園) 한때〉·〈화음 和音〉·〈아침〉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9년 시인 정현종과 결혼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조그마한 의상실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1973년 남편과 이혼한 뒤 생활고와 지병으로 인해 1982까지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발간하고 이어서 1988년 〈사람 그리운 도시〉와 1992년 〈하루치의 희망〉 등을 펴냈지만 문단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4년 출간한 〈마음의 수수밭〉을 시작으로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1998)를 통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외 시집으로 〈오래된 골목〉(1998)·〈하얀 달의 여신〉(1998)·〈너무 많은 입〉(2005) 등과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1999) 등이 있다.

 

오랫동안의 공백을 극복하고 문단에 다시 나와 다작을 하는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작품 수에 비해 경향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감성적이고 진솔한 시로 독자들과 좀더 친숙해졌고 오랜 연륜에서 오는 중후함과 인생의 운명에 결연히 대결하는 자세가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6년 〈단추를 채우면서〉로 소월시문학상을, 1998년〈물에게 길을 묻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너무 많은 입〉으로 공초문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7년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등으로 박두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에서 출생. 1966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