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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가을 편지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새벽편지, 민음사, 1987
정호승 시인 /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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