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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가을 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3.

정호승 시인 / 가을 편지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새벽편지, 민음사, 1987

 

 


 

 

정호승 시인 /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