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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가을의 말 5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3.

최하림 시인 / 가을의 말 5

 

 

지금은 돌아와 발을 씻는다

누른 담장을 지나 황혼이 문전을 빠져나가는

인식의 바깥에서 인식의 바깥에서

가을이여 가을이여

천마리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나날은 물처럼 진행되어가고

떨어져야 할 것도 잔명(殘命)의 것들도

지금은 품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오랜만에 우리들은 귀착(歸着)을 본다

날이 끝으로 지고 그 뒤에서

오랜 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세상을 보는 아내 불어오른 배로

세상을 담고 있는 아내여

내일은 죽음으로 떨어져가고

우리도 역시 그 길로 갈 것이다

내일은 죽음이다 내일은 물이다

나의 발이 담겨진 물

나는 문전을 빠져나가는 노을 속에서

이렇게도 오늘은 무상하게 물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최하림 시인 / 겨울 정치(精緻)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향하여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사람들이

어이어이어이 울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겨울나무를 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 지령(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 온다 개들이 짖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삼한(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

기다리는 노변에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

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