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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가을의 말 5
지금은 돌아와 발을 씻는다 누른 담장을 지나 황혼이 문전을 빠져나가는 인식의 바깥에서 인식의 바깥에서 가을이여 가을이여 천마리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나날은 물처럼 진행되어가고 떨어져야 할 것도 잔명(殘命)의 것들도 지금은 품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오랜만에 우리들은 귀착(歸着)을 본다 날이 끝으로 지고 그 뒤에서 오랜 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세상을 보는 아내 불어오른 배로 세상을 담고 있는 아내여 내일은 죽음으로 떨어져가고 우리도 역시 그 길로 갈 것이다 내일은 죽음이다 내일은 물이다 나의 발이 담겨진 물 나는 문전을 빠져나가는 노을 속에서 이렇게도 오늘은 무상하게 물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76
최하림 시인 / 겨울 정치(精緻)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향하여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사람들이 어이어이어이 울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겨울나무를 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 지령(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 온다 개들이 짖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삼한(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 기다리는 노변에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 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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