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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그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3.

최승호 시인 / 그늘

 

 

모두들 그를 바보 영감이라 불렀다.

모두들 옳다.

그는 바보였고 집도 가족도 없었다.

어쩌다 교회당 옆 작은 목장에

일거리를 얻어

그는 날마다 건초더미를 날랐고

우물에 눈을 져다 붓던 치성인(痴聖人)처럼

마냥 즐겁게 소의 똥 오줌을 퍼냈다.

 

이제 그는 누워 있다, 거적을 덮고

교회당 그늘 건초더미 위에 나흘째,

바람이 반백의 더부룩한 머리를 쓸어 주고

진눈깨비가 삐져 나온 발등을 덮어준다.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를 때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연보주머니가 돌아다닐 때

사랑을 배우며

신자들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때에도

그는 누워 있다,

거적송장이 되어

동굴 안에 죽은 예수처럼

나흘째

부활(復活)하지도 않으면서.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그로테스크한 죽음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 비마(悲魔)가 찾아 들어도

북어(北魚)는 슬프지 않아

한쪽 눈에서만 가짜 눈물이 흐른다

진흙 위에 꼬리 끄는 예술이

꼬리의 흔적이 길면 얼마나 길까

어느 날 하나씩 내게서 멀어져 가고

모두에게서 내가 멀어져 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날

죽음의 문턱에 덧니라도 걸어 놓고

북어(北魚)는 짖어야 하리라 밤의 아가리로 끌려 들어가면서

누구에게 짖어야 하나

아마 자궁을 향해 짖을 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욥은 아니지만

하늘을 향해 토할 말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비마(悲魔)가 찾아 들어

울대를 꼬챙이로 찔러도

눈을 까뒤집어도 늙은 북어(北魚)는 슬프지 않아

가짜 눈물이 뾰족한 덧니 적시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