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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가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3.

신경림 시인 / 가객

 

 

내 앵금 영 넘어가는 산새소리

내 젓대 가시나무 사이 바람소리

 

내 피리 밤새워 우는 산골 물소리

 

무서리 깔린 과일전

가마니 속 철늦은 침시

 

푸른 달빛에 뒤척이던 풋장꾼도

이른 새벽 눈 비비고 나앉아

 

골목 끝의 한뎃가마에

시래기국은 끓고

 

무서리 마르기 전 봇짐 챙겨

돌아가리라 새파란 하늘

잔풀 깔린 성벽을 타고

여기 한 개 그림자만 남겼네

 

내 앵금 이승 떠나는 울음소리

내 젓대 동무해 가는 가는 벌레 소리

내 피리 나를 보내는 노랫소리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가난한 북한 어린이

 

 

엄마는 돈 벌러 서울 가서 이태째 소식 없고

아빠도 엄마 찾아 집 나간 지 여러 달포

이제 보름만 더 있다 온다는

어쩌다 전화로 듣는 아빠 목소리는 늘 취해 있다

두동생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고

열두살 난 언니 하루 안 거르고 정거장에 나와 서지만

진종일 서울 땅장수만 차를 오르내리고

다 저녁때 지쳐 돌아오면

저희들끼리 끓여 먹은 라면 냄비 팽개쳐둔 채

두 동생 텔레비전 만화에 넋을 잃었다

다시 밥 대신 라면으로 저녁을 끓이고

열두살 난 언니는 일기에 쓴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없는 북한 어린이들이 가엾다고

가난한 북한 어린이들이 불쌍하다고

엄마 아빠 돈 벌어 돌아올 날을 믿으면서

 

* 지도: 신안의 어촌으로 옛날에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돼 있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