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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곯았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7.

신경림 시인 / 곯았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못 본 체 넘어가면

우리 발이 밟힌다

샅샅이 찾아내고

구석구석 뒤져내자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잡풀 여뀌 엉거시풀

뽑기도 좋게 곯았네

피새놓이 웃음에

속아서는 안된다

슬그머니 내민 흰 손

잡아서도 안된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골골마다 헤집어라

썩은 것 마른 것 골라내자

숨겨주고 덮어주고

넘어갈 때 아니니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가려낼 때

속인 자를 가려낼 때

지금은 뿌리칠 때

거짓 손길 뿌리칠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찾아갈 때

내 형제 찾아갈 때

지금은 손잡을 때

내 친구만 손잡을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 곯았네: 포천.철원.가평.여주 지방의 두벌 김맬 때 부르던 들노래로, 땅이 김매기 좋게 곯았다는 뜻의 노래.

** 뎅이: `덩이'의 속음(俗音)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군자(君子)에서

 

 

협궤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배인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 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 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은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짝도 없는 방문을 밀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음성은 통곡이 된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