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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곯았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못 본 체 넘어가면 우리 발이 밟힌다 샅샅이 찾아내고 구석구석 뒤져내자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잡풀 여뀌 엉거시풀 뽑기도 좋게 곯았네 피새놓이 웃음에 속아서는 안된다 슬그머니 내민 흰 손 잡아서도 안된다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골골마다 헤집어라 썩은 것 마른 것 골라내자 숨겨주고 덮어주고 넘어갈 때 아니니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가려낼 때 속인 자를 가려낼 때 지금은 뿌리칠 때 거짓 손길 뿌리칠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지금은 찾아갈 때 내 형제 찾아갈 때 지금은 손잡을 때 내 친구만 손잡을 때 곯았네 곯았네 뎅이만 슬슬 굴려라 새금파리 유리조각 찾기도 좋게 곯았네
* 곯았네: 포천.철원.가평.여주 지방의 두벌 김맬 때 부르던 들노래로, 땅이 김매기 좋게 곯았다는 뜻의 노래. ** 뎅이: `덩이'의 속음(俗音)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군자(君子)에서
협궤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배인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 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 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고 거칠다 미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풀어져 어둠이 덮은 가난 속을 절뚝거리면 우리는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지만 그러다 서로 헤어져 삽짝도 없는 방문을 밀고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음성은 통곡이 된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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