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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사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천양희 시인 / 사랑

 

 

약한자에게는

그대 마을이 크게 보인다

들판에는

한줄기 해가 기울고

외로운 사람 들판을 내려다본다

어둠에 찔려

비명 지르는 들을 벗어나

걸어서 그대 마을에 당도하리라

 

길고 짧은 불빛

드러내는 낯선 땅

불빛처럼 찬란한

그대의 심장 깊이 깊이

잠시, 긴 창(槍)을 꽂는다

 

땅위에

피투성이 그대

뼈가루가 튀어 오른다

마을 문턱까지 튀어 오른다

눈 부릅뜨고

미친 내가 튀어 오른다

약한 자에게는

그대 마을이 크게 보인다.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평민사, 1983

 

 


 

 

천양희 시인 / 산을 오르며

 

 

낮은 데서 바라보면

누가 저같이

높이 서고 싶지 않으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오르다보면

산꼭대기

제일 작은 꽃보다 더 작은 우리

 

높이 더 높이 서기 위해

얼마나 쓰러지고 일어났던가

높이높이 서서

거기 무엇을 남기려는가

 

산 가운데

사람소리 들리지 않고

메아리만 저혼자 되돌아온다

 

우리도 어차피

제자리로 올 것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산꼭대기에 높이 선 사람의 편

엉거주춤 산 밑의 많은 사람들

 

나날이 오르면서

오르지 못하면서

여기

슬픔만 지고 와서

내다 버린다.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평민사, 1983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에서 출생. 1966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