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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 다시 철원역에서
봄기차가 내 가슴 위로 지나간다 하얀 치자꽃 같은 너를 싣고 봄기차가 내 가슴의 철교 위를 지나간다 강물은 시퍼렇게 출렁이는데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내 야윈 가슴 위로 봄기차는 달린다 산모퉁이를 돌아 38선을 넘어 금강산 가는 길 옆 푸른 보리밭 이랑 사이로 끝끝내 사라지는 너를 보내고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서울역에 혼자 남아 김밥 하나 사먹고 끝끝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두만강에서
흐르지 않는 강이 있었다 우리의 가슴속으로만 흐르는 강이 있었다 강물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중조(中朝) 국경지대 겨울새들만 북한땅으로 날아 다니는 두만강에서 나는 강 건너 북한땅을 눈물 없이 바라보았다 멀리 겨울 비안개 사이로 김일성주체사상탑이 보이고 눈 내린 남양땅 산기슭에 속도전 세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우리의 가슴속으로만 건널 수 있는 강이 있었다 바람을 따라 강굽이를 돌아서자 겨울강 위에 앉았던 새들이 일제히 북한땅 강기슭으로 날아올랐다 북녘땅 강변의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마을의 아침 연기가 아련히 피어 오르고 도문교 위로 리어카를 끌고 한 사내가 북한땅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게 보였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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