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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다시 철원역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정호승 시인 / 다시 철원역에서

 

 

봄기차가

내 가슴 위로 지나간다

하얀 치자꽃 같은 너를 싣고

봄기차가

내 가슴의 철교 위를 지나간다

강물은 시퍼렇게 출렁이는데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내 야윈 가슴 위로

봄기차는 달린다

산모퉁이를 돌아

38선을 넘어

금강산 가는 길 옆

푸른 보리밭 이랑 사이로

끝끝내 사라지는 너를 보내고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서울역에 혼자 남아

김밥 하나 사먹고

끝끝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두만강에서

 

 

흐르지 않는 강이 있었다

우리의 가슴속으로만 흐르는 강이 있었다

강물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중조(中朝) 국경지대

겨울새들만 북한땅으로 날아 다니는 두만강에서

나는 강 건너 북한땅을 눈물 없이 바라보았다

멀리 겨울 비안개 사이로

김일성주체사상탑이 보이고

눈 내린 남양땅 산기슭에

속도전 세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우리의 가슴속으로만 건널 수 있는 강이 있었다

바람을 따라 강굽이를 돌아서자

겨울강 위에 앉았던 새들이

일제히 북한땅 강기슭으로 날아올랐다

북녘땅 강변의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마을의 아침 연기가 아련히 피어 오르고

도문교 위로 리어카를 끌고 한 사내가

북한땅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게 보였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