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승 시인 / 백범 묘소 앞에서
혁명은 따뜻하다 두만강 물소리가 들린다 휴전선을 넘어 더 깊은 조국으로 가는 길은 없다 밤은 깊어가도 하늘은 더 푸르고 별은 스러져도 바람은 더 푸르러 38푯말 앞에 아직 홀로 서 있다 지금도 이 길이 마지막 길 멀리 관악산이 울다가 잠이 들고 한강 철교를 지나가는 광복군들이 보인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벼꽃
월남 간 오빠는 오지 않았다. 벼꽃은 피고 패이고 또 피는데 오늘도 이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낫을 들고 빈 들로 나가 자작나무 가지들만 툭툭 자르고 홀에미는 논두렁에 주저앉아서 피 흘린 송금(送金)만 이야기한다. 벼꽃이 필 때 떠난 오빠야 자랄수록 도끼질 낫질만 하고 온 거리 돌며 돌며 넝마 줍던 오빠야 동란에 잃은 아들 찾아 헤매던 애비들도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고 놋그릇 빼앗기고 하늘 한번 쳐다보던 방공호에 파묻히신 외할머니도 송이버섯 따러 가서 끝내 오지 않았다. 나락단 움켜쥐고 가을하늘 후려쳐도 이른 새벽 부산항을 울며 서성여도 이기고 돌아오지 않는 나의 오빠야 벼꽃은 피고 패이고 또 피는데 우리는 아직 피난민이다. 달리던 남하(南下)의 피난열차 지붕 위에서 날마다 수없이 떨어져내리고 무너진 철교 위에 매달려 있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신달자 시인 / 아버지 (0) | 2020.01.21 |
|---|---|
| 김원경 시인 / 비문(非文)의 날 (0) | 2020.01.21 |
| 천양희 시인 / 여름날 외 1편 (0) | 2020.01.21 |
| 나태주 시인 / 가을 서한 1 외 1편 (0) | 2020.01.21 |
| 황지우 시인 / 솔섬 (0) | 202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