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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백범 묘소 앞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정호승 시인 / 백범 묘소 앞에서

 

 

혁명은 따뜻하다

두만강 물소리가 들린다

휴전선을 넘어

더 깊은 조국으로 가는 길은 없다

밤은 깊어가도 하늘은 더 푸르고

별은 스러져도 바람은 더 푸르러

38푯말 앞에 아직 홀로 서 있다

지금도 이 길이 마지막 길

멀리 관악산이 울다가 잠이 들고

한강 철교를 지나가는

광복군들이 보인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벼꽃

 

 

월남 간 오빠는 오지 않았다.

벼꽃은 피고 패이고 또 피는데

오늘도 이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낫을 들고 빈 들로 나가

자작나무 가지들만 툭툭 자르고

홀에미는 논두렁에 주저앉아서

피 흘린 송금(送金)만 이야기한다.

벼꽃이 필 때 떠난 오빠야

자랄수록 도끼질 낫질만 하고

온 거리 돌며 돌며 넝마 줍던 오빠야

동란에 잃은 아들 찾아 헤매던

애비들도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고

놋그릇 빼앗기고 하늘 한번 쳐다보던

방공호에 파묻히신 외할머니도

송이버섯 따러 가서 끝내 오지 않았다.

나락단 움켜쥐고 가을하늘 후려쳐도

이른 새벽 부산항을 울며 서성여도

이기고 돌아오지 않는 나의 오빠야

벼꽃은 피고 패이고 또 피는데

우리는 아직 피난민이다.

달리던 남하(南下)의 피난열차 지붕 위에서

날마다 수없이 떨어져내리고

무너진 철교 위에 매달려 있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