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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태주 시인 / 가을 서한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나태주 시인 / 가을 서한 1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 하일음(夏日吟)

 

 

나이 스물 하고도 다섯의

이 여름에

내게 있어 제일로 중요한 일은

여자들과 만나 시시덕이는 잡담이 아니고

오로지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이다.

혼자의 그 하얀 잔주름들을

잘 이겨낼 줄 아는 일이다.

 

가슴에 피어서 좀쑤시게 하는

분홍, 분홍, 연분홍의 안개들을

곱게 다스려

말간 이슬 한 종재기로라도

걸러내는 일이다.

 

비 갠 여름 점심 한나절쯤

조히,

꽃밭 귀퉁이에

국민학생용 나무의자라도 하나

가져다 놓고

꽃들이 수선떠는 그 소리없는

소리들의 모양새들을

착실히 구경하는 일이다.

 

 


 

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를 비롯,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과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동화집 『외톨이』 등이 있음.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화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