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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 가을 서한 1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우리 젊은 날의 사랑아, 청하, 1987
나태주 시인 / 하일음(夏日吟)
나이 스물 하고도 다섯의 이 여름에 내게 있어 제일로 중요한 일은 여자들과 만나 시시덕이는 잡담이 아니고 오로지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이다. 혼자의 그 하얀 잔주름들을 잘 이겨낼 줄 아는 일이다.
가슴에 피어서 좀쑤시게 하는 분홍, 분홍, 연분홍의 안개들을 곱게 다스려 말간 이슬 한 종재기로라도 걸러내는 일이다.
비 갠 여름 점심 한나절쯤 조히, 꽃밭 귀퉁이에 국민학생용 나무의자라도 하나 가져다 놓고 꽃들이 수선떠는 그 소리없는 소리들의 모양새들을 착실히 구경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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