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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0.

신경림 시인 /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 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 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 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랫 속에 빛을 보았을 때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나무 1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날개

 

 

강에 가면 강에 산에 가면 산에

내게 붙은 것 그 성가신 것들을 팽개치고

부두에 가면 부두에 저자에 가면 저자에

내가 가진 것 그 너절한 것들을 버린다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훨훨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어쩌랴 하룻밤새 팽개친 것

버린 것이 되붙으며 내 몸은 무거워지니

이래서 나는 하늘을 나는 꿈을 버리지만

누가 알았으랴 더미로 모이고 켜로 쌓여

그것들 서서히 크고 단단한 날개로 자라리라고

나는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강에 가면 강에서 저자에 가면 저자에서

옛날에 내가 팽개친 것 버린 것

그 성가신 것 너절한 것들을 도로 주워

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면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