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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내 시(詩)는 시의 그림자뿐이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최하림 시인 / 내 시(詩)는 시의 그림자뿐이네

 

 

시(詩)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달밤의 어릿광대

 

 

여름 뜰에서 다알리아가 되어

검붉은 꽃잎이 어둠으로 퍼지며

진한 설움을 동서로 남북으로 전할 적에

나는 무엇을 집착하고 있느냐

원고료 일만원의 의미밖에 없는, 그래서

마누라에게 핀잔이나 받는 시(詩)이냐! 시(詩)이냐!

여름밤의 벌레들이 제 설움에 시달려

울어대는 작은 마당에서

나의 설움을 우는 나는 독백(獨白)의 광대냐

멀리 남도에서 올라와 보아 주는 이 없는

춤을 추고 있는 달밤의 어릿광대냐

어릿광대의 시이냐.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