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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변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최승호 시인 / 변기

 

 

1

 

늦은 밤 불을 켜니

둥근 벽 변기에 빠져 있는

귀뚜라미,

몸뚱이보다 촉수가 긴 게

별 꽤나 헛더듬은 시인 같다.

거품의 밤을 울던 창녀 같다.

 

2

 

변기의 물 전체가 떨고

떨림의 진원점에

그가 있다

파도에 까만 눈이

어리둥절 흔들린다

 

내가 일으킨 파도에

내가 휩쓸려 익사하는 수도 있겠구나

 

3

 

둥근 벽 안에서 귀뚜라미가 헤엄친다

저쪽이 피안이겠지

출렁이며 헤엄쳐 가 닿는 순간

둥근 벽이 그를

밀어낸다

 

어쩔 것인가

가는 곳마다 둥근 벽이요

가지 않으면 천천히 몸이 가라앉을 때

 

4

 

굴원(屈原)이여

아무리 욕되도 죽지 못하는 자들을 왜 괴롭히는가

강물 속에서 거울을 들고

일어서는 큰 물귀신

 

살아서는 세상에 거슬리고

죽어서는 물살에 거슬렸던

기개있던 굴원(屈原)이여

나는 멋있는 놈이 아니다

세상이 본래(本來) 청정(淸淨)한데

나만 탁하다고 생각하니까

 

5

 

둥근 벽 밑바닥의

구멍은

언제라도 삼킬 준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린다

 

누구든 죽음의 반대편으로 노젓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구멍으로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왜 이리 오랜 날들을

겁 먹은 채

맴돌다가 들어가야 하는지

 

6

 

변기의 뚜껑을 덮으면

귀뚜라미의 절망은 완성된다.

둥근 벽을 덮치는 둥근 뚜껑,

나는 귀뚜라미를 건지지 않았다.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한 덩어리

둥글네모난 감옥을 이룬

뭐랄까,

임신해서 매장까지의 길들이

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건져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부르도자 부르조아

 

 

반이 깎여 나간 산의 반쪽엔

키 작은 나무들만 남아 있었다

 

부르도자가 남은 산의 반쪽을 뭉개려고

무쇠턱을 들고 다가가고

돌과 흙더미를 옮기는 인부들도 보였다

 

그때 푸른 잔디 아름다운 숲 속에선

평화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

그들은 골프공을 움직이는 힘으로도

거뜬하게 산을 옮기고

해안선을 움직여 지도를 바꿔놓는다

산골짜기 마을을 한꺼번에 인공호수로 덮어 버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누군가의 작은 실수로

엄청난 초능력을 얻게 된 그들을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