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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난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늙은 소나무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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