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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농무(農舞)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신경림 시인 /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눈길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 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난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 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늙은 소나무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