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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등꽃 아래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송수권 시인 / 등꽃 아래서

 

 

한껏 구름의 나들이가 보기 좋은 날

등나무 아래 기대어 서서 보면

가닥가닥 꼬여 넝쿨져 뻗는 것이

참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철없이 주걱주걱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잘게 부서져서 구슬 같은 소리를 내고

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어무린 색깔로

연등날 지등(紙燈)의 불빛이 흔들리듯

내 가슴에 기쁨 같은 슬픔 같은 것의 물결이

반반씩 한꺼번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것은

평발 밑으로 처져 내린 등꽃송이를 보고 난

그후부터다.

 

밑 뿌리야 절제없이 뻗어 있겠지만

아랫도리의 두어 가닥 튼튼한 줄기가 꼬여

큰 둥치를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너와 내가 자꾸 꼬여가는 그 속에서

좋은 꽃들은 피어나지 않겠느냐?

 

또 구름이 내 머리 위 평발을 밟고 가나보다

그러면 어느 문갑 속에서 파란 옥빛 구슬

꺼내 드는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매향비(埋香碑)

 

 

천년 세월이 가고 또

천년 세월이 저물어도 썩지 않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몸도 향기도 물에 젖어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 있다

누가 이르기를 땅 속에 묻지 말고

물 속에 묻어라

참귀목 하나가 우물 깊숙히 묻혀서

불타고 남은 진신사리(眞身舍利)

침향(沈香)이여, 침향이여

고요한 시간에 손을 씻고

극락강에 지는 노을 보며 찻잔을 들면

노을도 그새 삼십년인가 사십년인가

저 노을도 자고 나면 이 세상 무엇이 남는가

우리 육신 꽃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날로 떡갈나무 잎새들 그림자 엷어가니

타는 듯 끓는 절벽 위에

영혼의 불 켜고 앉아

나는 한밤중 홀로 비비새 되어 운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