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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 등꽃 아래서
한껏 구름의 나들이가 보기 좋은 날 등나무 아래 기대어 서서 보면 가닥가닥 꼬여 넝쿨져 뻗는 것이 참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철없이 주걱주걱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잘게 부서져서 구슬 같은 소리를 내고 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어무린 색깔로 연등날 지등(紙燈)의 불빛이 흔들리듯 내 가슴에 기쁨 같은 슬픔 같은 것의 물결이 반반씩 한꺼번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것은 평발 밑으로 처져 내린 등꽃송이를 보고 난 그후부터다.
밑 뿌리야 절제없이 뻗어 있겠지만 아랫도리의 두어 가닥 튼튼한 줄기가 꼬여 큰 둥치를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너와 내가 자꾸 꼬여가는 그 속에서 좋은 꽃들은 피어나지 않겠느냐?
또 구름이 내 머리 위 평발을 밟고 가나보다 그러면 어느 문갑 속에서 파란 옥빛 구슬 꺼내 드는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매향비(埋香碑)
천년 세월이 가고 또 천년 세월이 저물어도 썩지 않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몸도 향기도 물에 젖어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 있다 누가 이르기를 땅 속에 묻지 말고 물 속에 묻어라 참귀목 하나가 우물 깊숙히 묻혀서 불타고 남은 진신사리(眞身舍利) 침향(沈香)이여, 침향이여 고요한 시간에 손을 씻고 극락강에 지는 노을 보며 찻잔을 들면 노을도 그새 삼십년인가 사십년인가 저 노을도 자고 나면 이 세상 무엇이 남는가 우리 육신 꽃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날로 떡갈나무 잎새들 그림자 엷어가니 타는 듯 끓는 절벽 위에 영혼의 불 켜고 앉아 나는 한밤중 홀로 비비새 되어 운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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