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림 시인 /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묘비(墓碑)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 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 가는 제 가녈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무인도(無人島)
너는 때로 사람들 땀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밤마다 힘겹게 바다를 헤엄쳐 건너 집집에 별이 달리는 포구로 오는 걸 보면 질척거리는 어시장을 들여다도 보고 떠들썩한 골목을 기웃대는 네 걸음이 절로 가볍고 즐거운 춤이 되는구나 누가 모르겠느냐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나무와 꽃과 풀만이 아니라는 걸 악다구니엔 짐짓 눈살을 찌푸리다가 놀이판엔 콧노래로 끼어들 터이지만 보아라 탐조등 불빛에 놀라 돌아서는 네 빈 가슴을 와 채우는 새파란 달빛을 슬퍼하지 말라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가 안개로 덮어야 하는 네 갇힌 삶을 곳곳에서 부딪치고 막히는 무거운 발길을 깃과 털 속에 새와 짐승을 기르면서 가슴 속에 큰 뭍 하나를 묻고 살아가는 너 나의 서럽고 아름다운 무인도여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송수권 시인 / 등꽃 아래서 외 1편 (0) | 2020.01.25 |
|---|---|
| 황지우 시인 / 어디로 가면 개마고원이 나오는 거유? 외 1편 (0) | 2020.01.25 |
| 김선태 시인 / 글씨 혹은 새떼 (0) | 2020.01.24 |
| 최승호 시인 / 설경(雪景) 속 외 1편 (0) | 2020.01.24 |
| 송수권 시인 / 대숲 바람소리 외 1편 (0) | 202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