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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목계장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4.

신경림 시인 /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무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 묘비(墓碑)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 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 가는 제 가녈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무인도(無人島)

 

 

너는 때로 사람들 땀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밤마다 힘겹게 바다를 헤엄쳐 건너

집집에 별이 달리는 포구로 오는 걸 보면

질척거리는 어시장을 들여다도 보고

떠들썩한 골목을 기웃대는 네 걸음이

절로 가볍고 즐거운 춤이 되는구나

누가 모르겠느냐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나무와 꽃과 풀만이 아니라는 걸

악다구니엔 짐짓 눈살을 찌푸리다가

놀이판엔 콧노래로 끼어들 터이지만

보아라 탐조등 불빛에 놀라 돌아서는

네 빈 가슴을 와 채우는 새파란 달빛을

슬퍼하지 말라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가

안개로 덮어야 하는 네 갇힌 삶을

곳곳에서 부딪치고 막히는 무거운 발길을

깃과 털 속에 새와 짐승을 기르면서

가슴 속에 큰 뭍 하나를 묻고 살아가는

너 나의 서럽고 아름다운 무인도여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