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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설경(雪景) 속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4.

최승호 시인 / 설경(雪景) 속

 

 

눈동자에 흰눈 그득한 채 희고 흰 길 가다 눈사람에게 인사한다. `당신은 온몸이 눈송이뿐이군요. 당신이 참으로 은불(銀佛)이십니다' 눈사람이 바보달처럼 흰 웃음을 웃으니 눈송이들이 모두 흰 웃음을 웃는다. 은니빨 드러난 중 둘이서 어린애처럼 눈싸움을 하며 즐겁다. 적의 없는, 이 흰 소리, 그대로 두기로 한다. 나는 눈사람에게 인사하며 집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설경(雪景) 속 방 안에 있다. 나는 이불 쓰고 눕고, 스님들은 일어나 범종 울리고 목어(木魚)치는 새벽, 설경(雪景) 핀 눈동자 속으로 은불(銀佛)이 훤한 달을 이고 지나 간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세 개의 변기

 

 

1

 

변기에서 검은 혓바닥이 소리친다

 

고통은 위에서 풍성하게

너털웃음 소리로 쏟아지는 똥이요

치욕은

변소 밑 돼지들이 울음이라고

 

2

 

변기여,

내가 타일 가게에서

커다랗게 입 벌린 너를 만났을 때

너는 구멍으로써 충분히

네 존재를 주장했다

마치 하찮고 물렁한 나를

혀 없이도 충분히 삼키겠다는 듯이

네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너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내 존재를 주장해야 했을까

뭐라고 한 마디 대꾸해야 좋았을까

 

말해 봐야 너는 귀가 없고 벙어리이고

네 구멍 속은 밑 빠진 허(虛)구렁인데

 

3

 

나는 황색의 개들이 목에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똥을 혼자서 다 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변기 같은 아가리들을

 

개들의 시절의 욕심장이 개들아

너희들은 똥을 먹어도 참 우스꽝스럽고 넉살좋게 먹는다

구토도 없이

구토도 없이

 

나는 개들의 시체 즐비한 보신탕 골목에서

삶은 개의 뒷다리를 보았건만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