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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 / 설경(雪景) 속
눈동자에 흰눈 그득한 채 희고 흰 길 가다 눈사람에게 인사한다. `당신은 온몸이 눈송이뿐이군요. 당신이 참으로 은불(銀佛)이십니다' 눈사람이 바보달처럼 흰 웃음을 웃으니 눈송이들이 모두 흰 웃음을 웃는다. 은니빨 드러난 중 둘이서 어린애처럼 눈싸움을 하며 즐겁다. 적의 없는, 이 흰 소리, 그대로 두기로 한다. 나는 눈사람에게 인사하며 집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설경(雪景) 속 방 안에 있다. 나는 이불 쓰고 눕고, 스님들은 일어나 범종 울리고 목어(木魚)치는 새벽, 설경(雪景) 핀 눈동자 속으로 은불(銀佛)이 훤한 달을 이고 지나 간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세 개의 변기
1
변기에서 검은 혓바닥이 소리친다
고통은 위에서 풍성하게 너털웃음 소리로 쏟아지는 똥이요 치욕은 변소 밑 돼지들이 울음이라고
2
변기여, 내가 타일 가게에서 커다랗게 입 벌린 너를 만났을 때 너는 구멍으로써 충분히 네 존재를 주장했다 마치 하찮고 물렁한 나를 혀 없이도 충분히 삼키겠다는 듯이 네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너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내 존재를 주장해야 했을까 뭐라고 한 마디 대꾸해야 좋았을까
말해 봐야 너는 귀가 없고 벙어리이고 네 구멍 속은 밑 빠진 허(虛)구렁인데
3
나는 황색의 개들이 목에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똥을 혼자서 다 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변기 같은 아가리들을
개들의 시절의 욕심장이 개들아 너희들은 똥을 먹어도 참 우스꽝스럽고 넉살좋게 먹는다 구토도 없이 구토도 없이
나는 개들의 시체 즐비한 보신탕 골목에서 삶은 개의 뒷다리를 보았건만
灼晩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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