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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모카 커피를 마시며
이마 넓은 가을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둥글어진다 거년에 입다 둔 무명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보이지 않게 먼지들이 국화문 벽지에 쌓인다 아내가 모카 커피를 타 가지고 오는 소리 들린다 모카 향내는 색다르다 아내는 향내를 조금 쓰게 타올 때도 있고 조금 달게 타올 때도 있다 내 기분에 알맞게는 하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아니므로 그렇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산다 우리의 개성인 모서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 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 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게 감정이 고인다 감정이 가을잎 같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은 쓰다 아내는 사과를 쟁반에 받쳐들고 올 때도 있다 홍옥이 가을에는 향기롭다 나는 부사가 좋을 때도 있고 배가 좋을 때도 있으련만 말을 않고 홍옥을 먹는다 홍옥 냄새가 입 안을 감돌고 붉은 빛은 혀를 감칠나게 한다 향내는 감정이 된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방문
로버트 프로스트씨(氏)의 편지를 받고 그분의 목장에 갔었지요 그분이 손수 담장을 쌓고 가지치기를 한 목장에를요 오래 전부터 그분은 제게 목장에 꼭 한번 들러달라고 초대를 했댔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요 지난 연대에는 갈 엄두도 못 냈구요 왜냐구요? 아무리 그가 전원의 시인이라지만 미국인 아닙니까? 반미(反美)가 들끓던 시절에 그를 찾기란 누가 뭐래도 꺼림칙한 일이거든요 그래, 이래저래 미루다 지난 여름 사과꽃이 한창 필 무렵 목장에 갔었지요 마침 그분은 쇠사닥다리를 타고 가지들 속으로 들어가 일하고 있더군요 아직 한 개의 사과도 열리지 않았지만 가지들은 가득 사과를 매달고 있기라도 하듯 추욱 늘어지고 향기는 들녘으로 퍼져서 벌들이 윙윙거리고 즐거움 같은 평화가 곳곳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씨가 그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지 기억에 없습니다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던지 꽃들을 쓰다듬고 있었던지 아니면 자연이라는 대명상 속으로 들어가 있었던지…… 농사를 지어봤지만 과수 경험이 없어서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목장에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폐가 될지도 몰라서였습니다 목장을 나설 때 그분은 긴 팔로 나를 껴안고 등을 두들겼습니다 오던 길을 돌아 신작로로 나올 때까지 그분의 손길이 무겁게 등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만남이란 기적은 아니지만 흐뭇한 일인 듯했습니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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