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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태 시인 / 글씨 혹은 새떼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4.

김선태 시인 / 글씨 혹은 새떼

 

 

  철새 도래지를 다녀온 날 밤 책을 읽다

  글씨들이 새떼로 읽힌 적이 있다

 

  사각의 책장 가득

  까맣게 내려앉은 가창오리 떼

  글씨들이 갈갈거리며 시끄럽더니

  이리저리 헤엄치며 문장을 흐트러트리더니

  내 헛기침소리에 놀랐는지 푸드득

  수천수만의 비문으로 일시에 날아올랐다

  자기들끼리 거대한 몸 붓으로 허공에

  일필휘지 초서를 휘갈긴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책장 속으로 다시

  질서정연한 문장으로 내려앉았다

  이상한 착시다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자 다시

  글씨들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고

  하얗고 몽롱한 고요만 남아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가창오리 떼

 

  철새 도래지를 다녀온 날 밤 나는

  해독할 수 없는 새떼 한 권을 읽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1월호 발표

 

 


 

김선태 시인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간이역』, 『작은 엽서』, 『동백숲에 길을 묻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그늘의 깊이』 등과 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언어』, 『진정성의 시학』 등이 있음.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