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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석남꽃 꺾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송수권 시인 /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아그라 마을에 가서

 

 

1

 

원숭이떼들의 울음소리

캄캄한 숲 속에서 새어나오고

원주민촌에서 타오르는 저 밝은

모닥불 한 줄기

스콜이 퍼붓는 황혼 나절

나는 저려드는 온몸을 말리며

물소뿔에 독수리 문장(紋章)을 새겨 넣은

아그라 마을의 초입에서

추위에 떠는 거러지 하나를 만났다

 

콜록콜록……

 

산울림도 콜록콜록……

메아리도 없더라 콜록콜록……

가도 가도 긴 터널 콜록콜록……

 

세계는 외로운 송유관뿐이더라 콜록콜록……

얼마나 이 참회의 길을 걸어가야 콜록콜록……

저 끝없는 천국의 문에 이르는 것이랴 콜록콜록……

 

2

 

우리의 신(神)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 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神)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