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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아그라 마을에 가서
1
원숭이떼들의 울음소리 캄캄한 숲 속에서 새어나오고 원주민촌에서 타오르는 저 밝은 모닥불 한 줄기 스콜이 퍼붓는 황혼 나절 나는 저려드는 온몸을 말리며 물소뿔에 독수리 문장(紋章)을 새겨 넣은 아그라 마을의 초입에서 추위에 떠는 거러지 하나를 만났다
콜록콜록……
산울림도 콜록콜록…… 메아리도 없더라 콜록콜록…… 가도 가도 긴 터널 콜록콜록……
세계는 외로운 송유관뿐이더라 콜록콜록…… 얼마나 이 참회의 길을 걸어가야 콜록콜록…… 저 끝없는 천국의 문에 이르는 것이랴 콜록콜록……
2
우리의 신(神)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 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神)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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