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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병후(病後)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최하림 시인 / 병후(病後)에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마비를 비집고

무지개가 기일게 남쪽에 섰다

종합청사가 들어선

과천에서 압구정동 쪽으로,

걷기 어려운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걸음 한걸음 이동하면서, 나는

산길에서 무지개의 일곱색을 본다

프리즘이 없어도 색색으로 하늘을 빛내는

빗방울이 황홀해, 비 머금은 나무들이

야릇하게 반응하고 공기를 탐하는

후각이 나무들을 기억하려고 흥흥거린다

나는 오늘 후각을 여기 두고 싶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부랑자(浮浪者)의 노래 1

 

 

헤매는 자들아 헤매는 자들아

이제는 그만 마을로 돌아가

어린 날의 보리들을 보아라

서릿발같이 차거운 밤의

보리들을 보아라

이제는 그만 날리는 머리 풀어헤치고

밤이면 밤마다 시푸렇게 빛나는

네 하늘과 네 땅의

보리들을 보아라

보리들은 지천으로 자라서

사방을 가리언만 그대 눈엔

아무 보리 보이지 않고

산과 하늘에 넘쳐흐르는

보리밖에 보지 못하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