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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병후(病後)에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마비를 비집고 무지개가 기일게 남쪽에 섰다 종합청사가 들어선 과천에서 압구정동 쪽으로, 걷기 어려운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걸음 한걸음 이동하면서, 나는 산길에서 무지개의 일곱색을 본다 프리즘이 없어도 색색으로 하늘을 빛내는 빗방울이 황홀해, 비 머금은 나무들이 야릇하게 반응하고 공기를 탐하는 후각이 나무들을 기억하려고 흥흥거린다 나는 오늘 후각을 여기 두고 싶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부랑자(浮浪者)의 노래 1
헤매는 자들아 헤매는 자들아 이제는 그만 마을로 돌아가 어린 날의 보리들을 보아라 서릿발같이 차거운 밤의 보리들을 보아라 이제는 그만 날리는 머리 풀어헤치고 밤이면 밤마다 시푸렇게 빛나는 네 하늘과 네 땅의 보리들을 보아라 보리들은 지천으로 자라서 사방을 가리언만 그대 눈엔 아무 보리 보이지 않고 산과 하늘에 넘쳐흐르는 보리밖에 보지 못하네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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