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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정일 시인 / 욕망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권정일 시인 / 욕망

 

 

재스민 향의 유혹을 걸러내어 여름을 만들자마자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향기가 무성해지고 곧 투명한 병이 되었다 격렬과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향기는 독을 뿜었다

 

항문을 빠져나온 독성은 이내 단단해졌고 곧 몸의 영토가 되어 독은 피를 섭취하며 승승했다 피의 맛은 이미 물이었다가 이내 빙점이 되어 성업하는 나날들의 반복

 

도처에 향기를 뿌렸다 반드시 얼음에서 being 하는 것이 운명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처음부터 적당히 뿌려 본적 없는 눈부신 밀폐의 꽃밭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비대해졌다 나는

 

불꽃의 플라나리아,

 

자웅동체의 눈으로 보았다 누구나 향기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향기 속에서 살아왔고 향기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온 적이 없는 톱날이 지나가고 대팻밥이 날렸다

 

조금씩 남김없이 피를 흡입하는 밀랍이 되었다 죽은 욕망을 녹취하다가 오래 먹지 못했고 꼭대기만 쳐다보았다 날아야했다 드라큘라뾰족지붕은 자주 붉은 잇몸을 드러냈고

 

다시 샤넬5 향을 사칭하여 겨울을 만들었다 향기에 취해 굴러다녔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손목을 긋는 리스컷트 증후군이 내 몸의 외곽을 둘러쌓았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12월호 발표

 

 


 

권정일 시인

1961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어머니는 수묵화였다〉가 당선되어 등단. 2003년에는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발간. 시집으로 『마지막 주유소』 (현대시, 2004)와 『수상한 비행법』(북인, 2008)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