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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산(山) 1번지(番地)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 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에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산동네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한 스무 해 징역을 살고 나와보니 온갖 잡짓으로 돈벌고 또 여편네 앞장세워 출세한 것들이 투사가 되고 지사가 된 세상이 어이없어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보는 줄 알지만 아아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눈도 코도 없는 줄 알지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산에 대하여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돼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울어지는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만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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