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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윤상원로(尹常源路)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8.

황지우 시인 / 윤상원로(尹常源路)

 

 

사식집이 즐비한 을지로 3가, 네거리에서

 

나는 사막을 체험한다.

 

여러 갈래 길, 어디로 갈 테냐,

 

을지로를 다 가면

 

어느 날 윤상원로(尹常源路)가 나타나리라.

 

사랑하는 이여,

 

이 길은 대상(隊商)이 가던 비단길이 아니다.

 

살아서, 여럿이, 가자.

 

나는 너다, 문학과지성사, 1987

 

 


 

 

황지우 시인 / 잠든 식구들을 보며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잠들어 있다.

 

  마지막 뉴스 보도, 24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한미(韓美) 장병 15명을 태운 헬기(機),

  `합동군사훈련중 동해(東海)에 침몰.'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없었다.  `구공화당(舊共和黨)인사 국민당 입당의사(入黨意思)표시.' 아무 일도 없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정신대(挺身隊)할머니태국서40년만에나타나.'  없었다. 오늘은,  없었다.

 

  오늘은, `탈영병(脫營兵)1명생포(生捕)1명은자살(自殺).' 없었다, 아무 일도,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아내를 열광시키는 해태 타이거즈팀이 참패했어도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아직도 티.비 속에서 잠들어 있다.

 

  김숙희, 십여년 전 영치금을 넣어주고 간 중산층(中産層)의 딸,

  나는, 내가 부르조아가 되는 것을 한사코 두려워했다.

  잘못 내려온 선녀. 철없는 부르조아.

  나는 너의 온몸에 가난의 문신(文身)을 그려놓았다.

 

  나의 욕망이 낳은 두 아이들을 양팔에 안고

  너는 이 세상에 자고 있는, 그러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

  아이들을 안고 승천하는 그대가 이 지상에 드리운 옷자락 끝

 

                   질긴 인연이구나.

 

  양자강(揚子江) 일대에서 밤새 동진(東進)하는 저기압권 가장자리에서 흔들리고있다.

 

                   놓아라. 아이들은 무고(無辜)하다.

                           이미 그대의 복강(腹腔)을 떠난 아이들.

 

  잠든 어린것들을 한밤중에 내려다보고 있으면

  눈물난다. 그들 앞에 놓인 번개치는 바다,

 

                           어떻게 건너가려 하느냐?

                                        환란의 날들,

            삶과 죽음의 고온다습한 협곡(峽谷)을 지나.

  이 무후한 애벌레들이 깨고 나올 세상, 그 입구에서 맞는 옥문(獄門)이여.

 

  어머니,  어머니,  생각납니다.

  당신이 울면서 문 열고 나간 접견실이.

  내 마음에는 아직도 문이 안 닫히고

  이 모두가 인질입니다. 당신도, 제 새끼들도.

  인질극을 벌이는 탈영병들을 핸드 마이크로 불러내는 어머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돌아가세요!

 

  이 질긴 몹쓸 핏줄을 어떻게 끊어버릴까?

 

         이 웬수놈아 어쩌자고 이 짓을 저질렀느냐, 어쩌자고?

 

                  어서 나와라!

 

  `백기앞에서라!'   목숨은 살아야제!

 

  `항복하라!'   어서 나와라!   너무 늦었어요.

 

                  어서 나와!   끝장예요, 어머니,

 

  어머니, 그러나 당신이 사금파리 젖가슴을 찍던 젊은날,

  그 끝장을 뚫고 갔던 여인이 돌아왔습니다.

 

  1KM를 나라비 서서 범한, 무참한 사타구니.

  일식(日蝕)의 남지나해여, 해일(海溢)이여,

 

                                 삼켜다오.

            해도 달도 뜨지 않는, 맹목의 40년, 아 40년!

 

  부끄러워 돌아갈 수가 없는 땅. 그녀가 버린 땅, 그녀가 잊은 땅.

  끝끝내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더러운, 더러운 땅.

  이 역사는 반성하지 않았다. 참회하지 않는다. 개전(改悛)의 정도 없이

  선고유예된 세월. 용서받지 못. 어떻게 그 새끼가 또 나오나?

 

  털갈이하는 개.  그래, 그래, 잘못은 개인에게 있지 않아.

  바뀐 주인에게 찾아가는 개.  아아, 이제는 성 안으로,

  내 발자취를 냄새 맡고 쫓아오는 개. 이제는 들어갈 수 없어.

 

  잠든 식구들이여. 내가 떠난 후, 나를 찾지 마라.

  곧 심판의 날이 오리라. 내 형제의 눈에 든 티를 회한의 눈물이

 

  몰아내리라, 형제들아, 다음에 올 세상을 믿어라, 티엔티 폭탄

  트럭을 몰고 달려간 회교도 청년, 화염 속의 내세(來世)로 갔다.

 

  우리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조금씩조금씩 그곳으로

  가고 있다. 우리들 한평생을 지렛대로 하여 떠올리는 역사,

 

  우리가 통곡하며 맨주먹으로 치던 이 무표정한 바위 덩어리.

  숙희야, 너는 지금 이 돌 속의 캄캄한 잠을 자고 있구나.

 

  대뇌, C-Fibre 속의 너의 내세(來世), 도솔천을 산책하는가?

 

  내 친족의 그윽한 살냄새로 가득한 안방, 우리가 함께 순장(殉葬)된

  무덤 같다. 그러나 이 무덤 밖에는 오늘,

 

  양자강(揚子江) 밤바람이 불고

  유가족의 가슴을 쥐어뜯는 동해(東海), 파고 1.5M의 밤바다로부터

  전신에 불 켠 발동선(發動船) 한 척이 돌아오고 있다.

 

  쉬었다 갈 이 세상으로.

  숙희야, 이 세상은 어느 날, 우리가 그랬듯이

  네가 안고 있는  이 아이들을 소환할 것이다.

 

  역사는 이 미감아들을 또한 분노와 슬픔, 격정과 사랑으로

  감염시킬 것이다.

 

  내놓아라. 내려놓아라

  나는 두 아이들을 떼어놓고 두 팔을 아내의 가슴에

  포개어준다. 옻나무 관에 그대를 입관(入棺)하듯.

 

그리고 너와 나, 누구든 하나가 먼저 가겠지만

어느 날 네가 죽으면, 내 가슴 지하(地下) 수천 M에 너를 묻으리.

 

餠煎こすシ觀壙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