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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의자의 수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9.

최승호 시인 / 의자의 수렁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 가는 사람은

팔걸이에 늙은 팔을 걸치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수렁으로 꺼져 간다

배꼽구멍쯤이 수렁에 잠긴 당신과

목구멍이 수렁에 파 묻히는

나, 그 다음엔

삼켜진 우리들을 수렁이

물과 진흙으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삐꺽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가는 사람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한숨을 쉰다

토막난 탯줄 삼킨 밤의

어둠이 흘러 드는 입술

그토록 빈 말을 거품처럼 늘어 놓은 입과

부글대던 귀 사이의

뻑뻑해진 근육을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아, 안 돼, 이렇게 꺼져갈 순 없어!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자동판매기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