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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인 / 의자의 수렁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 가는 사람은 팔걸이에 늙은 팔을 걸치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수렁으로 꺼져 간다 배꼽구멍쯤이 수렁에 잠긴 당신과 목구멍이 수렁에 파 묻히는 나, 그 다음엔 삼켜진 우리들을 수렁이 물과 진흙으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삐꺽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가는 사람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한숨을 쉰다 토막난 탯줄 삼킨 밤의 어둠이 흘러 드는 입술 그토록 빈 말을 거품처럼 늘어 놓은 입과 부글대던 귀 사이의 뻑뻑해진 근육을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아, 안 돼, 이렇게 꺼져갈 순 없어!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자동판매기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灼晩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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