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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아이스크림과 택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9.

송종규 시인 / 아이스크림과 택배

 

 

그는 한 때 미루나무였을 것이다 미루나무는

한 시절 구름이었을 것이다

구름은 한 때 함성이었을 것이다 함성은 수많은 입술들이

쏘아올린 초록,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미루나무 옆을 지나가고 미루나무 위로 한 무리의 구름이 지나가고

온갖 홀씨들이 바람에 나부낄 때 듣는다 함성,

 

그는 한 때 공원의 의자였을 것이다 의자는

한 시절 공중에 매달린 그믐밤의 달이었을 것이다

달빛은 파문 달빛은 소요 달빛은 폐허 무심한 듯 쏟아져 내리는

모래의 알갱이들,

 

당신이 안전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공원의 벤치 곁을 지나갈 때 아이스크림이 손가락처럼 녹아내릴 때,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봉투를 뜯기도 전에 계단이 차오른다

막 도착한, 택배

 

계간 『문학의 오늘』 2019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배롱나무 아래

 

 

전화가 안 되니까 엽서를 쓰기로 했네 우체국이 없으니까 사람을 보내기로 했네 사람들이 바쁘니까 오토바이를 보내야 겠네

사람들은 열두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네 오토바이가 없으니까 달아나는 시간을 잡을 수가 없다네

 

KT와 백화점은 닫혀 있고 우체국은 허물어지고 많은 생각들이 나뭇잎처럼 흩날린다네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무도 호명할 수 없네

자 이제 KT를 세우고 우체국과 은행을 건설하자

 

호수의 오리는 차디 찬 수면 위에 생을 잠시 정박해 두었다네 주유소가 없으니까 달아나는 트럭을 잡을 수가 없네

약속은 파기되고 채무자는 달아나고 눈 덩이처럼 연체료가 불어날 것이네

자 이제 상수도와 정오를 옹립하고 편의점을 건설하자

 

망치와 드릴과 포크레인을 찾았는데 드라이버를 구할 수가 없네

부서진 글씨들이 공중으로 날아가고 한낮의 주전자는 끓고 있는데

백척간두의 고지가 지척에 있다 해도 당신은 결국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나는 지금 천 년 전 배롱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계간 『애지』 2019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3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