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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여름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신경림 시인 /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마천: 경남 산청군에 속하는 지리산 아랫마을.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열림굿* 노래

 

 

네 뼈는 바스라져 돌이 되고

네 팔다리 으깨어져 물이 되어

이루었구나 이 나라 한복판에

크고 깊은 산과 강 이루었구나

 

네 살은 썩어 흙이 되고

내 피 거름되어 흙 속에 배어

피웠구나 산기슭 강가에

붉고 노란 온갖 꽃 피웠구나

 

내가 쏜 괴로움에 네게 찔린 아픔에

아흔아홉 고비 황천길

되돌아오기 몇만 밤이던가

울고 떠돌기 몇만 날이던가

 

이제는 형제들 모여 붙안고 울 때

네 바스라진 머리통에 내 혀를 대고

내 깨어진 어깨에 네 입술을 대고

마음 활짝 열어제껴 통곡할 때

 

못나고 어리석었던 한세월을 우는구나

우리를 갈라놓고 등져 세우고

갈가리 찢은 자들 찾아 길 나서는구나

너를 쏜 총과 나를 찌른 칼을 버릴 때

 

우리 몸에 붙은 더러운 먼지를 털 때

원수들에게 더럽혀진 마음을 씻을 때

이제는 울음을 멈추고 몸에 붙은

우리들 몸에 붙은 때와 얼룩을 씻을 때

 

서로 찌르고 쏜 형제들 다시

아픈 상처 어루만지며 통곡하는구나

썩어 문드러진 팔다리 쓸어안고 우는구나

크고 깊은 산과 강이 따라 우는구나

 

붉고 노란 온갖 꽃들이 우는구나

들판을 덮은 갈대들이 우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 길 나설 때

원수들 찾아 눈 부릅뜨고 우는구나

 

* 열림굿: 여주.원성.중원 지방의 정원놀이로, 지난 한 해의 다툼과 갈림을 씻는 화해놀이. `열림'은 연다는 뜻과 풍요의 뜻 둘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며, 굿을 무당이 주재하지 않고 마을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하는 것이 특색임.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죽은 아이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비석치기 사방치기 자치기 하면서

늦콩 열린 들길 산길을 메우고

엿장수 가위소리에 어깨춤을 추는구나

어허 넘자 요령소리에 비칠걸음 치는구나

 

사라졌던 것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가시내들 삼베치마 삼승버선 입고 신고

올곡 선뵈는 장골목을 메우는구나

엿장수 가위소리에 덩더꿍이 뛰면서

휘모리 숨찬 가락 흥이 절로 나는구나

 

잃어진 것 잊혀진 것들이 돌아들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데불고 가는구나

 

도가(都家)집 사랑, 깊은 골방마저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겼구나

들판을 고갯길을 선창을 메우면서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들 따라가는구나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