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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홈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최승호 시인 / 홈통

 

 

그래도 아직 영혼만은

신비벽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네 조상들의 눈으로는

이무기에 용(龍)이 들어 있었다

산삼에 산신(山神)이 들어 있었다

 

후손인 우리네 눈으로는

이무기에 정력제가 들어 있다

산삼에 우글대는 분자(分子)들이 들어 있다

 

용(龍)은 정력제

산신(山神)들이 분자(分子)들로 변한 만큼

인간도 벌거벗겨진 벌건 대낮에

 

죽은 이무기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는 홈통들을 나는 본다

산성비에 더 빨리 부식되고

구멍이 뚫려가는 굵은 홈통들을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휘둥그래진 눈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창을 던졌을 때

작살에 찔려 허공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눈은 휘둥그래졌고

세상은 놀라움의 광채를 띠게 되었다.

죽음을 품고 햇빛을 더 강하게

죽음을 품고 어둠을 더 거칠게

그리고 낯설음을

더욱 낯설게 느낄 수 있는

회복기(回復期) 병자들의 거울,

거울 속의 해골바가지여,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 희귀한 성자(聖者)

 

 

자신은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 막대기

물이 쏟아지지 않는 그 거화(巨貨)빌딩 화장실엔

6척(尺)의 똥막대기 하나가

언제나 벽에 기대어 서서 당황한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사용해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구원은커녕 좀처럼 씻겨 내려가지 않는

악마 같은 똥덩어리를 힘껏 떠밀어서

변기의 구멍 깊이 쑤셔넣은 다음

반드시 벽에 다시 세워놓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더러움 앞에서 쩔쩔매며

꼼짝없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수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은 아무리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막대기

 

灼晩 미래사, 1991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