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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 정든 땅 정든 언덕 위에
낯선 곳 낯선 풍경을 지치도록 달리다 보면 예 살던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도 마음에 맺히는 거 물방아는 처릉처릉 하얀 물잎새를 쳐내고 달맞이꽃이 환한 밤길은 솔솔 어디선가 박가분 냄새가 코를 미었다 나는 지금 남부 이탈리아 롬바르디 평원을 달리며 이 평원을 다 준다 해도 내 편히 쉴 곳 없음을 안다 베르디가 노래한 아침 태양도 내 가슴을 적셔 내리진 못한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성곽에서 종이 울리고 진군의 나팔소리 따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다고 일러 주지만 아무래도 내 깃들일 수 있는 곳은 이 대평원이 아니라 대숲 마을을 빠져 나온 저녁 연기들이 낮게 낮게 깔리는 그러한 들판이었다 시냇물이 좔좔 흐르고 몇 개의 징검돌이 놓이고 벌떡벌떡 살아 뜀뛰는 어린 날처럼 물방개라도 만나보고 싶은 곳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낯선 곳 낯선 풍경을 달리다 보면 이리도 흙냄새 그리운 거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거 아아 문둥이 장돌뱅이처럼 내 가슴에 닳아지는 얼굴들 지금쯤 흙담집 앞뒤란을 캄캄하게 겨울눈이 내리고 햇빛이 맑은 아침나절은 앞 마당 참새 발자국도 깝죽거리겠다 구석진 골목길 왕거무가 집을 짓다 말고 따뜻이 등을 기대이겠다 멀리 보리밭 들판을 청둥오리떼 날아 내리고 보리싹 밀싹 파 먹느라 또 남녘벌 끝 시끄럽겠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제(祭)ㅅ날
천 길 눈구렁 속에 까마귀 울음 파묻히고 고비나물 한 두름 장바구니에 담아 오고 큰고모 작은고모 장바구니에 기별 통지하고 길등(燈)을 따라 길등(燈)을 따라 호롱불 그리메 크던 귀신아 닭이 울면 돌아가던 귀신아 대추나무 연이 걸린 자리, 지금도 대추는 붉어 소리치는가 대추 한줌 놓고 울고, 빈 물 떠 놓고 울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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