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2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2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세상은 문득 적막

 

아니다 얘야

널더러 굽히란 말 아니다

너 하나 바라고 사는 이 어미

어찌하면 좋으냐고 묻는다 얘야

가르쳐다오 얘야 부디

내게 가르쳐다오

 

꽃샘철

잠시 한낮 세상은 적막

담 넘어오는 희미한 목소리 희미한 흐느낌

일찍 핀  매화 봉오리 가지째 찢어져

눈밭에 누워버린

누워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꽃샘철

세상은 문득 적막

내 마음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6

 

 

황매꽃 피는 사월 밤

가까이서 잎새 지는 소리

잔바람 나직이 스쳐 지나고

가까이서 누군가

숨죽여 내쉬는 한숨 소리

어두운 방에 누워

팔 뻗어 찾는 물주전자

손끝에 와 닿는 차가움

가까이서 가까이서

꽃몽올 하나 지는 소리

수첩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몇 줄 짧은 글귀들

불붙어 화안히 천정에서 스러지고

내일 다시는 해가 뜨지 않으리

무너져 내리는 마음

밑 모를 어둠으로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

가까이서 문득 멈춰 서는

발자욱 소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22

 

 

온종일 난초

허리는 굽고 다리는 펼 수 없고

눈은 차차 침침해지는데

온종일 난초 또 난초

 

가슴 속 위 아래 좌우 함부로 불던

바람도 그쳐 이젠 기척 없고

노을 무렵 이윽고

잎새도 마저 자취 없고

땅에 기울어 시드는 꽃대

오월 가까운 초저녁 꿈속을

문득 배회하는 아득한 향기

흰 종이 위에 멈춰 소리 없는 몇 방울의 먹.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34

 

 

마루 밑은 들여다볼수록 컴컴하다

열길 물 속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 속

더우기 내 속 그 속속에 있는 네 속

안팎 본디 없는데 자꾸 이러니 병일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45

 

 

풀 끝

흰 이슬에서만 아니라

시드는 춘란 잎새에서도

파릇파릇한 상치싹만 아닌

흩어진 겹동백 저 지저분한 죽음에서도

외로운 겨울 햇빛처럼

작게 반짝이는

네 눈

애린의 눈

천둥 아직 들리지 않는 뭉글대는

태풍구름 속 번뜩이는

빈 눈.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50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