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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2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세상은 문득 적막
아니다 얘야 널더러 굽히란 말 아니다 너 하나 바라고 사는 이 어미 어찌하면 좋으냐고 묻는다 얘야 가르쳐다오 얘야 부디 내게 가르쳐다오
꽃샘철 잠시 한낮 세상은 적막 담 넘어오는 희미한 목소리 희미한 흐느낌 일찍 핀 매화 봉오리 가지째 찢어져 눈밭에 누워버린 누워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꽃샘철 세상은 문득 적막 내 마음 눈보라치다 볕들다 진눈깨비 몰아치다 소나기 퍼붓다 서풍은 끝간 데 없이 휘몰아치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6
황매꽃 피는 사월 밤 가까이서 잎새 지는 소리 잔바람 나직이 스쳐 지나고 가까이서 누군가 숨죽여 내쉬는 한숨 소리 어두운 방에 누워 팔 뻗어 찾는 물주전자 손끝에 와 닿는 차가움 가까이서 가까이서 꽃몽올 하나 지는 소리 수첩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몇 줄 짧은 글귀들 불붙어 화안히 천정에서 스러지고 내일 다시는 해가 뜨지 않으리 무너져 내리는 마음 밑 모를 어둠으로 한없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 가까이서 문득 멈춰 서는 발자욱 소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22
온종일 난초 허리는 굽고 다리는 펼 수 없고 눈은 차차 침침해지는데 온종일 난초 또 난초
가슴 속 위 아래 좌우 함부로 불던 바람도 그쳐 이젠 기척 없고 노을 무렵 이윽고 잎새도 마저 자취 없고 땅에 기울어 시드는 꽃대 오월 가까운 초저녁 꿈속을 문득 배회하는 아득한 향기 흰 종이 위에 멈춰 소리 없는 몇 방울의 먹.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34
마루 밑은 들여다볼수록 컴컴하다 열길 물 속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 속 더우기 내 속 그 속속에 있는 네 속 안팎 본디 없는데 자꾸 이러니 병일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45
풀 끝 흰 이슬에서만 아니라 시드는 춘란 잎새에서도 파릇파릇한 상치싹만 아닌 흩어진 겹동백 저 지저분한 죽음에서도 외로운 겨울 햇빛처럼 작게 반짝이는 네 눈 애린의 눈 천둥 아직 들리지 않는 뭉글대는 태풍구름 속 번뜩이는 빈 눈.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50
땅 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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