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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언덕길을 오르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

신경림 시인 / 언덕길을 오르며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백두산까지 가겠지.

머리에 하얀 눈 뒤집어쓰고

두 동강난 내 땅

눈물로 굽어보고 서 있는

백두산까지 가겠지.

더러운 것 온갖 먼지에 쓰레기

총이며 칼 따위까지도

몸 한 번 크게 흔들어

털어 버리고 싶어 몸살난

백두산까지 가겠지.

산자락에 호랑이며 곰도 기르고

바위 틈서리에 푸섶에

새며 벌레도 키우면서

잘린 허리 다시 아물 날

이빨 악물고 손꼽아 보는,

턱 아래 산마을에서

멀리 제주 갯마을까지

보듬고 싶어

어루만지고 싶어

밤낮으로 눈물 마를 날 없는,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그 백두산까지 가겠지.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어머니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밤나무숲 오솔길을 지나 산기슭에

아버지와 함께 묻히신 그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묻힌 땅, 내 피가 스민 흙을 밟고 지나갈

수백만 형제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탱크소리가 아닌, 군화발소리가 아닌

춤추듯 가벼운, 기쁨에 들뜬 발자국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터지는 포탄소리 총탄소리 아닌

감격과 기쁨의 만세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뼈와 살이 썩은 흙 위에서

형제들 얼싸안고 뒹구는 통곡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긴 사십 해 그리웠던 그리웠던 이름 외쳐 부르며

목놓아 우는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보아야 합니다.

어른 아이 늙은이 젊은이 사내 계집 얼려

월워리청청 강강수월래에 맞춰 빙빙 돌아가는

끝없이 멀리 뻗친 크고 큰 춤을 보아야 합니다.

내 뼈를 쿵쿵 울릴 그 힘찬 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릴 업수이 본 자들을 우릴 속인 자들을

두려워 떨게 할 그 춤을 보아야 합니다.

바다 밖 멀리 내쫓을 형제들의 춤을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둠 따위 가시밭 따위 불바다 따위 단숨에 몰아낼

그 큰 노랫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노랫소리에 놀라 도망칠

비겁한 무리들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이 춥고 어두운 땅 속에 묻혀서

또는 구만 리 적막한 황천을 떠돌며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 발자국소리 그 노랫소리 듣기까지

형제들의 그 큰 춤 보기까지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

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

꽃이 피던 날은 억울해 울다

재넘어 장터에서 종일 취했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차라리 한 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

못 버린 미련이라 좌판을 거두고

이제 이 흙 속 죽음 되어 누웠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